항목 ID | GC04900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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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暾 |
이칭/별칭 | 광서(光瑞),죽석(竹石),숙헌(肅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출생 시기/일시 | 1716년 - 조돈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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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40년 - 조돈 증광시 병과 5위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790년 - 조돈 졸 |
추모 시기/일시 | 1799년 - 조돈 숙헌(肅憲) 시호 받음 |
출생지 | 조돈 출생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
거주|이주지 | 조돈 낙향지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 |
부임|활동지 | 조돈 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유배|이배지 | 조돈 유배지 - 충청북도 제천시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풍양(豊壤) |
대표 관직 | 양주 목사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광서(光瑞), 호는 죽석(竹石). 할아버지는 돈령부 도정을 지낸 조도보(趙道輔)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조상경(趙尙絅)이다. 어머니는 이정태(李廷泰)의 딸이다. 동생은 조엄(趙曮)과 조정(趙晸)으로 모두 현달하였다.
[활동 사항]
조돈(趙暾)[1716~1790]은 1740년(영조 16) 증광 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여 설서·정언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5년(영조 21) 부수찬·수찬·교리·헌납·집의를 거쳐 1748년(영조 24) 양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아홉 달이 지나자마자 응교로 제수되어 다시 내직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관련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1750년(영조 26) 북평사에 제수되었고, 1756년(영조 32)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761년(영조 37) 순흥 부사와 개성 유수를 역임하였는데, 이때 업무를 성실히 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한성부 우윤·함경도 감사·대사헌을 거쳐 1764년(영조 40) 경과(慶科)의 시망(試望)에 든 신료인데도 불구하고 시험에 응하지 않아 엄한 명을 어겼다는 죄로 제학 윤급(尹汲)과 함께 호남의 역촌(驛村)에 정배되었다가 보름 뒤 방면되어 이천 부사에 제수되었다.
1767년(영조 43) 형조판서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 경상 감사로 외직에 나아갔다가 1768년(영조 44)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때부터 관직에 뜻을 접고 여러 차례 걸휴(乞休)[자진 사퇴]를 바라는 상소를 올리다가 제천현에 부처(付處)되기도 하였다. 1771년(영조 47)에도 여러 차례 걸해(乞骸)[늙은 재상이 벼슬을 내놓고 은퇴하기를 임금에게 주청하던 일]하여 결국 치사(致仕)를 허락받고 양주 백석 천죽리(川竹里)[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에 낙향하였다. 이때 조돈은 천죽리의 ‘죽(竹)’과 백석의 ‘석(石)’ 글자를 따서 자신의 호를 스스로 ‘죽석’이라고 지을 정도로 자신이 태어난 곳에 이어 이곳을 또 다른 고향처럼 여겼다고 한다.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799년(정조 23) 숙헌(肅憲)이란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