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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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奎瑞 |
이칭/별칭 |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잠와(蠶窩),문숙(文叔),충정( 忠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잠와(蠶窩).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는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5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최집(崔潗), 할아버지는 최진해(崔振海),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최석유(崔碩儒)이다. 어머니는 광주 김씨(光州金氏)이다.
[활동 사항]
최규서(崔奎瑞)는 소론(少論)의 대표적인 인물로, 특히 완소(緩少) 계열에서 소론의 온건한 입장을 지지하였다. 1650년(효종 1)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다. 1680년(숙종 6) 별시 병과에 급제, 출사하여 1685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이조 좌랑·수찬 등을 역임하면서 최석정(崔錫鼎)을 변호하는 등 소론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1688년 6월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으나, 그해 8월 요승(妖僧) 여환(呂還) 사건으로 파직당하였다. 이 사건은 『숙종실록(肅宗實錄)』 1688년 8월 1일자 기사에도 자세히 실려 있는 사건으로, 여환이라는 요승이 스스로를 신선이라 하면서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다닌 일이었다. 여환의 세는 자못 커서 서울 바깥뿐만 아니라 도성 안에도 소문이 퍼졌고, 이에 미혹되거나 가담하여 일을 꾸민 사람이 11명이 된다고 하였다.
최규서는 양주 목사로 재직하는 중에 여환의 무리에 대한 진상과 실상을 자세히 조사하여 조정에 알렸지만, 조사 과정에서 백성들 사이에 큰 혼란이 생기자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바로 대사간으로 내직에 복귀하여 장희빈(張禧嬪)의 중전 책봉을 반대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694년(숙종 20)에는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 관찰사·강화 유수를 역임하고, 이후 예조 판서·홍문관 대제학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702년(숙종 28)에는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지만 이내 사직하고 경기도 안성으로 낙향하였다. 이후로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지만 계속 사직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1721년(경종 1) 좌의정에, 1723년 영의정에 제수되었지만 곧 사양하였고, 이후에 신임사화와 무신난(戊申亂) 등 큰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온건 소론인 완소 계열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1735년(영조 11)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시문집인 『간재집(艮齋集)』 15권이 있다.
[묘소]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