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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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昌大 |
이칭/별칭 | 효백(孝伯),곤륜(昆侖),창괴(蒼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효백(孝伯), 호는 곤륜(昆侖). 증조할아버지는 인조 대에 반정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최명길(崔鳴吉)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다.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딸이며, 부인은 판서를 지낸 오두인(吳斗寅)의 딸이다.
[활동 사항]
최창대(崔昌大)는 1669년(현종 10) 소론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아버지 최석정이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을 위해 변론하다가 파직되어 문외 출송(門外黜送)되고, 장인인 오두인이 인현 왕후 폐위를 반대하다가 장살(杖殺)당했으며, 최창대 본인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 출향을 반대하다가 처벌을 받는 등 정치적 격변기를 겪어야 했다. 이 시기에 최창대는 주로 전국의 명산대찰을 유람하며 학문을 닦았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와해되고 소론계가 집권하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이듬해부터 승문원 검열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이후로 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헌납·응교 등의 언관직을 거쳐 1704년(숙종 30) 사서(司書)·이조정랑, 1706년 사간·응교를 지내고 1710년 9월 9일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임명되어 9월 30일 숙종에게 하직하고 양주에 부임하였다.
1711년(숙종 37) 2월 10일 최창대는 양주 목사에서 개차(改差)되었는데, 그 이유는 같은 일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적혀 있다. 서종태(徐宗泰)가 숙종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최창대는 양주 목사로서의 임무에 소홀하여 경기 감사에게 이미 파출(罷黜)당하였고, 서울에 사는 어머니의 병이 깊어 가까이에서 병구완을 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면으로 보나 양주 목사의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조정의 판단으로 해임되었다. 1711년 대사성에 승진하였으며, 그 뒤 이조참의·부제학·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720년(숙종 46) 사직동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문집인 『곤륜집(昆侖集)』 20권 10책이 전해진다.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