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87 |
---|---|
한자 | 洪葳 |
이칭/별칭 | 군실(君實),청계(淸溪),창람(蒼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군실(君實), 호는 청계(淸溪)·창람(蒼嵐). 할아버지는 홍숙(洪琡)이고 아버지는 진사 홍원호(洪遠湖)이다. 어머니는 조정호(趙廷虎)의 딸이고, 부인은 덕수 이씨(德水李氏)이다.
[활동 사항]
홍위(洪葳)는 이단상(李端相), 김수항(金壽恒)과 교류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묘지명을 썼다는 사실에서 그가 서인으로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1649년(인조 27) 홍위는 성균관 학생일 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 종사를 여러 번 주청하였다. 1650년(효종 1) 문과에 합격하고 1652년 정언·지평, 1654년 부수찬·수찬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국정의 여러 현안과 궁가(宮家)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림으로써 언행이 절실하고 빈말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1655년 이조좌랑과 1656년 교리를 거치고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다녀왔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따르면, 1657년(효종 8) 1월 3일 양주 목사 망단자(楊州牧使望單子)가 이조에서부터 나와 국왕이 대신들과 논의하여 홍위를 양주 목사에 제수하였다. 이에 홍위는 1월 15일에 부임지로 떠나기 위해 하직하였고, 홍위가 ‘전임 양주 목사’라고 지칭되는 6월 23일 전까지 약 다섯 달 동안 양주 목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홍위는 양주 목사로 재임 중인 5월 11일 양주의 수변민결(水邊民結)에 선역(船役)을 지우는 문제, 남한산성의 조미(糶米) 문제, 장병아문(掌兵衙門)의 군정 사정(軍丁査定) 문제 등을 상소하여, 양주 지역의 폐단을 제거하고 군민(軍民)을 위무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효종은 ‘다소의 폐단과 진달한 여타의 일들은 백성을 진실로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가상히 여기며, 민고(民苦)와 관계된 문제들을 묘당[의정부]에서 즉시 처치하도록 하겠다’는 비답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후 홍위는 동래 부사·경상도 관찰사·동부승지를 차례로 역임하다가 1660년(현종 1) 10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1695년(숙종 21) 아들인 홍천서(洪天敍)가 홍위의 문집인 『청계집(淸溪集)』을 간행하였다.
[묘소]
처음에는 광주부(廣州府) 서쪽에 장사지냈다가 1686년(숙종 12) 경기도 양주 선영으로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