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88
한자 洪重疇
이칭/별칭 도진(道陳)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72년연표보기 - 홍중주 생
활동 시기/일시 1699년 - 홍중주 식년시 진사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부정으로 낙제하였다가 구제
부임|활동지 홍중주 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풍산(豊山)
대표 관직 양주 목사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도진(道陳)이다. 할아버지는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이며, 할머니는 선조의 첫째 딸인 정명 공주(貞明公主)이다. 아버지는 두 번이나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우참찬에 이른 홍만용(洪萬容)으로,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활동 사항]

홍중주(洪重疇)[1672~?]는 1699년(숙종 25) 식년시에서 진사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김필정(金必禎)과 모의하고 차서(借書)한 부정을 저질렀다가 자수하여 낙제되었다. 그러나 당시 예조 참판 송창(宋昌)이 차서는 차술(借述)이나 대술(代述)과는 달라 낙제를 시키는 것은 억울하다고 구제하여 합격하였다. 이는 당시 과거에서의 부정 문제를 조정에서 논의하고 방침을 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장악원·공조 등을 거쳐 1714년(숙종 40) 금천 군수로 부임하였으며, 파주 목사·호조정랑·청풍 부사·선공 부정 등의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 3월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으나 5월 병으로 인혐(引嫌)[벼슬아치가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을 느낌]하자 경기도 관찰사가 파면하였다. 그러나 비변사에서 계를 올려, 양주는 경기도의 큰 주군(州郡)이며 선왕의 능이 모여 있는 중요한 곳으로, 근래 폐단이 막심하였으나 홍중주가 부임한 이후 정사에 힘써 상당히 좋아진 부분이 있으므로 파면을 취소하고 계속 재임하게 해 달라고 두둔하였다.

같은 해 8월 영조경종의 의릉(懿陵)에 행차한 뒤 재실에서 경기도 관찰사와 양주 목사 등을 불러 백성들의 고통에 대하여 묻자, 홍중주가 군포 탕감과 진휼 등의 대책을 건의하였다. 10월에도 또한 환곡과 군포를 탕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 양주 목사로서 홍중주의 치적을 인정하여, 12월에 다시 한 번 경기도 관찰사가 파면하려 하였으나 영조가 파직하지 않고 홍중주로 하여금 계속 정무를 보도록 하였다.

1727년(영조 3) 아버지 홍만용의 연시(延諡)[나라에서 조상에게 내리는 시호를 물려받음]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 정언 신처수(申處洙)의 탄핵을 받고 형 홍중범(洪重範)·홍중복(洪重福)과 함께 사판(仕版)[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그 해 7월 영월 부사로 임명되었고, 이어 교하 군수·동지의금부사·우윤 등을 거쳤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