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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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廷彧 |
이칭/별칭 | 경문(景文),지천(芝川),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조선 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세종 대의 명재상으로 유명한 영의정 황희(黃喜)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행호분위 부호군(行虎賁衛副護軍) 황열(黃悅)이고, 어머니는 이후원(李厚源)의 딸인 양천 허씨(陽川許氏)이다.
[활동 사항]
황정욱(黃廷彧)[1532~1607]은 1558년(명종 13) 문과에 급제하고 사관·예문관 검열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사간원·성균관·홍문관 등에서 근무하였는데, 특히 1567년 경연에서 진강(進講)[왕이나 동궁의 앞에서 학문을 강의하던 일]한 뒤 노수신으로부터 ‘강관 제일(講官第一)’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1569년(선조 2)에는 춘추관의 편수관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수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73년(선조 6)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고, 아버지를 부양하려고 외직에 보임되기를 청하여 1575년(선조 8) 양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양주 목사 재임 중 아버지가 병이 들자 황정욱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결국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1578년(선조 11) 상을 마치고 군기시 판관이 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황정욱은 아버지의 상을 치르느라 양주 목사로서 재임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1578년부터 진주 목사·해주 목사·충청도 관찰사 등 주로 외직을 역임하였고, 1584년(선조 17)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가 되어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쳤다. 이에 호조와 병조의 참판을 거친 뒤 1587년(선조 20)부터 호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임해군(臨海君)[선조의 맏아들], 순화군(順和君)[선조의 여섯 번째 아들]을 배종하다가 회령부에서 왜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선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글을 쓰라고 황정욱에게 강요했는데, 황정욱이 이를 거절하자 두 왕자와 그의 손자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황정욱의 아들 황혁(黃赫)이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대신 써 주었다. 이 일로 전쟁이 끝난 뒤 동인의 집중 공격을 받아 길주로 유배되었다가 복권되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문집인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7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종계변무 주청사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1590년(선조 23)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록되고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607년(선조 40)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