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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01
한자 李在學
이칭/별칭 성중(聖中),지포(芝浦),익헌(翼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향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45년연표보기 - 이재학 생
활동 시기/일시 1770년 - 이재학 정시 병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801년연표보기 - 이재학 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05년 - 이재학 유배 풀림
추모 시기/일시 1806년 - 이재학 직첩 돌려받음
추모 시기/일시 1820년 - 이재학 익헌(翼獻) 시호 받음
부임|활동지 이재학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유배|이배지 이재학 유배지 - 평안도
유배|이배지 이재학 이배지 - 함경도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용인(龍仁)
대표 관직 형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도봉산 일대에서 시회를 갖고 『도봉첩』을 제작한 문신.

[가계]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성중(聖中), 호는 지포(芝浦). 증조할아버지는 은진 현감을 지낸 이의규(李宜揆)이고, 할아버지는 호조 좌랑을 지낸 이보순(李普淳)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 이숭우(李崇祐)로, 현감 이보흥(李普興)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계보상 이보흥의 손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화천군(花川君) 김협(金浹)의 딸이고, 부인은 정동현(鄭東鉉)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재학(李在學)[1745~1801]은 1770년(영조 46) 정시에 응시하여 병과 5위에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12월 한림권점(翰林圈點)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며, 정조 즉위 후 사간·교리·형조참의·이조참의·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재학은 형조판서로서 일을 잘 처리하였으며, 정순 왕후(貞純王后)의 오라비인 척신 김구주(金龜柱)를 탄핵하여 나주로 유배시켰다. 순조 즉위년인 1800년 산릉도감 당상의 직임을 맡았으나 공역(工役) 지연 등의 이유로 파직되었고, 채지영(蔡趾永) 등의 탄핵을 받아 1801년(순조 1) 가산군(嘉山郡)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이듬해 온성부(穩城府)에 이배되었다. 이재학은 온성부로 옮겨온 지 7개월 만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1805년(순조 5) 유배가 풀리고 1806년(순조 6) 직첩(職牒)을 돌려받았다.

이처럼 순조 즉위 직후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였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이재학은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 왕후 및 집권층이었던 노론 벽파(僻派)와 대립적인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정순 왕후로부터 신임을 얻고 순조에 의해 중용되었던 서용보(徐龍輔)와는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두 사람은 도봉산을 함께 방문하여 시회(詩會)를 개최하고, 이를 기념하여 『도봉첩(道峰帖)』을 제작하였다.

[상훈과 추모]

1820년(순조 20) 순조익헌(翼獻)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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