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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65
한자 成晩徵
이칭/별칭 달경(達卿),추담(秋潭),환성당(喚醒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기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59년 11월 7일연표보기 - 성만징 생
활동 시기/일시 1696년연표보기 - 성만징 남인의 송시열 도봉 서원 배향 반대 상소 반박
몰년 시기/일시 1711년 1월 15일연표보기 - 성만징 졸
추모 시기/일시 1787년 - 성만징 문경 한천 서원에 배향
출생지 성만징 출생지 - 경상북도 상주시 연원동
거주|이주지 성만징 이주지 -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묘소|단소 성만징 묘소 -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어산리
사당|배향지 한천 서원 -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농암리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창녕(昌寧)
대표 관직 왕자사부(王子師傅)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과 관련하여 활동한 인물.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달경(達卿), 호는 추담(秋潭), 환성당(喚醒堂). 창녕 성씨(昌寧成氏) 17세손이다. 아버지는 성호영(成虎英), 어머니는 덕수 이씨(德水李氏)로 5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이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와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성만징(成晩徵)은 1659년(효종 10) 11월 7일 상주(尙州) 흥암리(興巖里)[현 경상북도 상주시 연원동]에서 태어났다. 1686년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1703년(숙종 29) 내시교관(內侍敎官)과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09년(숙종 35) 문경(聞慶) 쌍룡동(雙龍洞)[현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1710년(숙종 36) 12월 부수(副率)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15일 돌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지만 노론(老論)에 속했던 성만징은 노론의 입장을 옹호하는 여러 활동을 했다. 특히 1696년(숙종 22) 남인(南人)인 정시한(丁時翰) 등이 송시열(宋時烈)도봉 서원(道峰書院) 배향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경상도의 노론 유생들을 이끌고 격렬하게 반박했다. 또한 1704년(숙종 30) 만동묘(萬東廟)[송시열의 유명(遺命)으로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의종과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세운 사당]의 향사(享祀)에 대한 남인의 공격이 있자 송시열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학문과 저술]

성만징의 집안은 증조부 대부터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면서 정치적으로 노론에 속해 있었으며 영남 지역에서 노론 서원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흥암 서원(興岩書院)의 운영 주체였다. 성만징의 아버지 성호영도 송시열에게 ‘안양와(安養窩)’라는 호를 받기도 했다. 성만징 역시 1680년(숙종 6) 직접 화양동(華陽洞)으로 송시열을 찾아갔으며 부친상을 당했을 때 송시열에게 예법을 문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만징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이는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였다. 1691년(숙종 17) 권상하를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어 성만징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을 논했다. 그래서 성만징권상하의 문인인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권상하성만징의 묘표(墓表)를 쓰기도 했다. 현재 성만징의 문집으로 『추담 문집(秋潭文集)』이 전해진다.

[묘소]

묘표(墓表)에는 1711년 5월 20일에 상주 서쪽 어산(於山)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어산리로 추정된다.

[상훈과 추모]

1787년(정조 11) 문경(聞慶) 한천 서원(寒泉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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