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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71
한자 金墰
이칭/별칭 사관(士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혜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78년연표보기 - 김담 생
활동 시기/일시 1708년 - 김담 식년 진사시 급제
거주|이주지 양주목 노원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광산(光山)
대표 관직 판결사(判決事)

[정의]

조선 후기 송시열도봉 서원 배향에 반대한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관(士寬). 할아버지는 김시성(金是城)이고, 아버지는 전 행병조좌랑(前行兵曹佐郞)을 지낸 통덕랑(通德郞) 김우화(金遇華)이다. 김우화[1656~1727]의 자는 이현(而顯)으로 1695년 황감 별제(黃柑別製)에서 장원을 하여 주택을 하사받았으며 그해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봉상시정(奉常寺正)에까지 올랐다.

[활동 사항]

김담(金墰)은 1678년(숙종 4)에 출생하였으며,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김창협은 아버지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유배된 서인이었으나 이이(李珥)이황(李滉)의 학설을 절충한 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김담은 1708년(숙종 34) 식년시(式年試)에서 진사(進士)가 되고 1713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717년 중시(重試) 을과(乙科)에 각각 급제하였다. 찰방(察訪), 장령(掌令), 통덕랑(通德郞) 판결사(判決事) 등을 지냈다.

경종 대와 영조 대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있으면서 송시열도봉 서원(道峰書院) 배향 철폐에 반대한 이교악(李喬岳)을 논핵[잘못이나 죄과를 논하여 꾸짖음]하였다. 이 때문에 이교악과 교류했던 지평(持平) 이정소(李廷熽)가 체직(遞職)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상소하여 시정을 논하였는데, 1732년(영조 8)에는 소장(疏章)의 용어가 무엄하다 하여 관작(官爵)을 삭탈(削奪)당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되었다. 이후 다시 장령에 복귀되고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었으나, 1742년(영조 18) 청송(聽訟)[재판을 하기 위하여 송사를 들음]과 관련하여 뇌물을 받고 처리한다는 집의(執義) 김종태(金宗台)의 상소에 의해 파직되었다. 이후의 행적과 정확한 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학문과 저술]

스승인 김창협의 영결(永訣)을 위해 지은 제문(祭文)이 김창협의 유고집인 『농암 별집(農巖別集)』에 수록되어 있다. 김담은 이 글에서 김창협이 말년에 세상에 뜻을 버리고 노원(蘆原)에 거처를 마련하여 은둔하며 후학 양성에 매진할 때 찾아뵈며 가르침을 듣곤 하였으며, 이때 김창협이 근처의 도봉 서원에 머물면서 아침저녁으로 자신의 거처에 와서 강론을 들으라고 권하였으나 다른 일 때문에 따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김창협이 갑자기 별세하니 애통하기가 그지없다고 서술하면서, 고난의 연속이었던 김창협의 삶을 위로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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