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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77
한자 金世輔
이칭/별칭 자징(子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혜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71년연표보기 - 김세보 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31년 - 김세보 남양부에 송덕비를 세웠다고 전하지만 현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음
몰년 시기/일시 1732년 6월 7일연표보기 - 김세보 졸
추모 시기/일시 1782년 - 김세보 묘비 건립
묘소 서울 초안산 분묘군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 산8-3 외~도봉구 창동 산202-1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서울 초안산 분묘군에 두 부인과 합장된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징(子徵). 증조할아버지는 김응룡(金應龍)인데 병자호란 때 전사한 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김승신(金承信)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僉知中樞) 김상현(金尙玹)이다. 생모는 용인 이씨(龍仁李氏)이며, 계모(繼母)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김세보(金世輔)는 남양 홍씨(南陽洪氏) 홍달선(洪達善)의 딸과 혼인하였고, 다시 강음 이씨(江陰李氏)와 재혼했으며, 두 부인 모두 김세보와 합장되었다.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절충(折衝)을 지낸 아들 김태정(金泰禎)이 있으며,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김광택(金光澤)·김광하(金光河)·김광한(金光漢)·김광수(金光洙) 등 4명의 아들을 두었고, 안구(安球)와 혼인한 딸이 한 명 있었다. 손자로서 김태정의 아들 김홍(金泓)·김유(金濡)·김형(金泂)·김호(金澔)·김순(金淳)·김심(金深)·김연(金演)이 있으며 손녀는 현희문(玄喜文)과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김세보는 1671년(현종 12)에 태어났으며,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를 모셨다. 가세가 너무 가난해서 어머니를 봉양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려서 행상을 했는데, 이내 큰돈을 벌자 스스로 만족할 줄을 알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말하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을 헤아려 거스름이 없었으며, 3명의 이복형제가 모두 따로 살고 있었는데도 매일 김치와 장(醬)을 가져다주고 모두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거친 베옷만을 입었다. 병자호란 때 아버지가 죽자 친모와 합장하고, 베옷으로 갈아입은 후 종신토록 비단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1732년 6월 7일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교(東郊)의 초헌현(軺軒峴) 남향에 묻혔다.

[묘소]

서울 초안산 분묘군 내에 묘소가 있으며, 두 명의 부인인 남양 홍씨, 강음 이씨와 합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김세보의 묘소 앞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공 세보지묘 숙부인 남양 홍씨 숙부인 강음 이씨 부(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金公世輔之墓 淑夫人南陽洪氏 淑夫人江陰李氏 祔)’라고 새긴 묘비가 서 있다. 이 비는 1782년(정조 6)에 세워졌으며, 앞면의 글씨는 강세황(姜世晃)[1712~1791]이 예서(禮書)로 쓰고 음기(陰記)는 신대우(申大羽)[1735~1809]가 썼다. 묘갈명(墓碣銘)은 김세보의 손자 김형의 부탁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광여(李匡呂)[1720~1783]가 지었다.

묘갈명의 내용에 따르면 김세보가 남양부(南陽府)[현재 경기도 화성시 일대]의 중군(中軍)으로 있으면서 군졸들을 매우 아끼고 군기(軍器)를 잘 정비하였기에 세간의 칭송을 받았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1731년(영조 7)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땅에 파묻혀 버린 것을 후에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의 사당 옆으로 옮겨 묻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송덕비에 대해서는 현재 그 전래 여부나 내용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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