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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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湘 |
이칭/별칭 | 대성원교국사,의지,해동화엄초조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홍기승 |
[정의]
도봉 지역에 사찰을 세우고 활동하였던 통일 신라 시대의 승려.
[개설]
의상(義湘)[625~702]의 출신과 집안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송고승전』은 속성이 박씨(朴氏)이며 계림(鷄林) 출신이라 기록하였으나 『삼국유사』는 성이 김씨(金氏)이며 부친의 이름은 한신(韓信)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진골 귀족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활동 사항]
625년(진평왕 47)에 태어난 의상은 653년에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였다. 유학의 뜻을 품고 원효(元曉)와 함께 육로를 통해 당(唐)으로 가려 했으나 고구려군에 붙잡혀 첩자로 오인 받고 억류되었다가 돌아왔다. 하지만 661년(문무왕 1) 무렵 바닷길을 통해 재차 입당(入唐)을 시도하여 성공했다. 이후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있던 지엄(智儼)의 문하에 들어가 화엄학을 배우며 현수(賢首), 도선(道宣) 등과 교유했다. 668년(문무왕 8)에 지엄이 세상을 떠나자 670년(문무왕 10)에 신라로 귀국하였다.
신라로 돌아온 후에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리고 황복사에서 화엄 교학을 강론하는 등 다양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676년(문무왕 16) 2월에 왕명을 받아 태백산(太白山)에 부석사(浮石寺)를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화엄 사상을 비롯한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는 데 앞장섰다. 그래서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 등 10대덕(大德)을 비롯한 3천 명의 제자를 키웠으며, 해인사(海印寺), 범어사(梵魚寺) 등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사찰을 세웠다.
의상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도봉산의 천축사(天竺寺)도 이 무렵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천축사는 도봉산의 선인봉 남쪽에 있는데, 의상이 세웠을 당시에는 옥천암(玉泉庵)이라는 암자였다. 천축사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한 뒤에 절을 중창하면서 지은 것이다.
[사상과 저술]
의상은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로 평가받는다. 의상의 화엄 사상은 지엄의 문하에 있으면서 남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 잘 압축되어 있다. 초기 연구에서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多卽一)’로 흔히 요약되는 의상의 화엄 사상에 대해 신라 중대의 전제 왕권과 결탁하여 전제 왕권을 뒷받침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의상이 『화엄일승법계도』에서 연기(緣起)의 본질을 밝혔을 뿐이며, 오히려 의상의 화엄 사상은 모든 대립물 간의 본질적인 무차별성, 즉 평등성을 강조하였다는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한편 의상은 화엄 사상 외에도 관음 신앙(觀音信仰)과 미타 신앙(彌陀信仰)의 확산에도 힘썼다. 관음 신앙과 미타 신앙은 상대적으로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이해하고 다가설 수 있었던 만큼, 의상이 이를 통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의상의 노력은 삼국 통일 전쟁으로 피폐해졌던 민중들의 삶에 위안을 주고 사회 안정에도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의상의 저술로는 『화엄일승법계도』를 비롯해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1권,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1권, 『백화도량발원문』,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또한 의상이 직접 지은 것은 아니지만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추동기(錐洞記)』, 『도신장(道身章)』, 『법융기(法融記)』, 『진수기(眞秀記)』 등도 있었다고 한다.
[묘소]
의상은 702년(효소왕 11)에 세상을 떠났다. 『송고승전』에 탑(塔)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시신을 화장한 후에 유골을 담아 탑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삼국유사』 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 기사에는 신라 불교의 10명의 성인을 소상(塑像)으로 빚어, 경주 흥륜사의 금당에 안치하였다고 하는데 의상도 여기에 포함된다.
[상훈과 추모]
의상이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되는 1101년(숙종 6) 8월 4일에 고려 숙종은 조(詔)를 내려 원효와 의상에게 각각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대성원교국사(大聖圓敎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그들이 머물렀던 곳에 비석을 세워 덕을 기리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