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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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載裕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류정선 |
출생 시기/일시 | 1905년 8월 28일 - 이재유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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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4년 4월 - 이재유 보성 고등보통학교 2학년 편입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이재유 송도 고등 보통학교 사회 과학 연구회 조직 |
몰년 시기/일시 | 1944년 10월 26일 - 이재유 졸 |
추모 시기/일시 | 2006년 - 이재유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
출생지 | 이재유 출생지 - 함경남도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 82 |
활동지 | 이재유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
성격 | 공산주의 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조선 공산당 재건 경성 준비 그룹 조직원 |
[정의]
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이각범(李珏範)이고, 어머니는 이씨이다. 이각범은 함경남도 삼수군 별동면사무소의 고원(雇員)과 삼수군청의 서기 등을 전전하다가 이재유가 20살인 1924년에 사망하였다. 어머니 이씨는 이재유가 3살 때 병사하였다. 이재유는 할아버지 이계남(李啓南)과 할머니 이씨와 같이 살았다.
[활동 사항]
1. 유년기-청소년기
이재유(李載裕)[1905~1944]는 1905년 8월 28일 함경남도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 82번지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배웠다. 한때 삼수의 공립 보통학교 5학년에 보결 입학하였으나, 4개월 만에 퇴학하였다. 1922년 무렵 상경하여, 1924년 4월 보성 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 시험을 쳐서 입학하였다가 3개월 만에 월사금 미납과 아버지 사망으로 퇴학하였다. 1925년에는 개성 송도 고등 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 시험을 쳐서 합격하였다. 송도 고등 보통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기 시작하여,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함께 사회 과학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반종교 투쟁에도 적극 나서며 동맹 휴학을 주도하다가 1926년 11월 기독교 계열이었던 송도 고등 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1926년 12월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하여 니혼 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에 학적을 두고 고학을 하였는데, 학비 때문에 다시 퇴학하였다.
2. 공산주의 운동의 시작
이재유는 니혼 대학 퇴학 뒤 일본에서 노동 운동에 종사하여 전국 무산자 평의회, 동경 합동 노동조합을 비롯한 좌익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후 조선인 노동 단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재일본 조선 노동 총동맹, 동경 조선 노동조합 북부 지회, 재동경 조선 청년 총동맹, 신간회 동경 지회 등 각종 노동 단체와 사상 단체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이와 함께 비합법 운동에도 참여하여 1928년 4월 조선 공산당 일본 총국[책임 비서 인정식]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두 달 후인 6월부터 일본 경찰 측에 요시찰인으로 감시받게 되었고 결국 1928년 8월에 제4차 조선 공산당 관계자로 검거되어 조선으로 호송되었다.
1930년 11월 5일 경성 지방 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3년 6개월, 500일 미결 통산을 선고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32년 7월 다시 경성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옥중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아, 사상적인 면에서는 자본론과 사적 유물론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고, 실천적으로는 노동절 기념 투쟁과 석공 파업 투쟁을 벌였으며, 조직적으로는 노동 운동가인 김삼룡(金三龍), 농민 운동가 이성출(李星出), 학생 운동가 이현상(李鉉相) 등 이후 운동의 3대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3. 당 재건 운동
1929년 4차 조선 공산당 검거 사태 이후 제삼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어느 정파도 조선 공산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을 통한 공산당의 재건을 명하였다. 이후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은 적색 농민 조합 운동이나 적색 노동조합 운동 등을 통하여 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재유도 옥중에서 기존 운동의 지식인 중심주의, 파벌주의를 비판하며 대중 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32년 12월 만기 출옥 후 김삼룡, 이성출, 이현상 등을 규합하여 트로이카 운동을 전개하였다. 트로이카 운동은 유력 지도부가 먼저 당을 조직하고 대중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세 마리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끄는 것과 같이 회원 전부가 각각 자유로이 선전하고 투쟁하여 아래로부터 당을 조직하는 운동 방식을 의미하였다.
이재유는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공장과 학교 등에서 대중적 노동 운동을 전개하여 1933년 서울 고무 공업소, 종연 방적 동대문 공장 등의 파업과 학생들의 독서회 및 동맹 휴학 등을 지도하였다. 하지만 숙명 여자 고등 보통학교 독서회 등이 발각되면서 점차 사건이 확대되어 1934년 1월과 2월 사이에 이재유를 포함한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34년 4월 중순 이재유는 경찰서에서 탈출하여 검거에서 빠져나온 경성 제국 대학의 정태식과 같은 대학의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와 합류하여 미야케 시카노스케의 집에 은신하였다. 5월 21일 미야케 시카노스케와 정태식이 검거되었지만 이재유는 미야케 시카노스케의 집에서 빠져나왔고, 8월부터는 박진홍(朴鎭洪)과 부부 행세를 하면서 조직 복구에 나섰다. 11월 경 이관술(李觀述)·박영출(朴英出) 등과 조선 공산당 재건 경성 재건 그룹을 꾸려서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과 조선 공산당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 일부가 1934년 10월경부터 경찰 감시망에 포착되어 검거되기 시작하였고, 1935년 1월에는 박진홍과 박영출이 검거되었다.
3. 양주군에서의 활동
이에 이재유는 이관술과 함께 1935년 5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은신하였고, 서울을 왕래하며 조직 복구에 노력하였다. 1935년 9월부터는 은신 중이던 동지들과 연결이 되어 조선 공산당 재건 경성 준비 그룹 활동을 펼쳐나갔고, 1936년 10월 하순에는 조선 공산당 재건 경성 준비 그룹의 명의로 기관지 『적기』를 창간하여 같은 해 12월 3호까지 인쇄·배포하며 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936년 12월 2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서 조직원 최호극과의 산중 약속장소가 발각되면서 도주 중 창동역 800m 남쪽에 있던 철도 건널목 부근(현 녹천역 근처)에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예심과 세 차례의 공판을 거쳐 1938년 7월에 징역 6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옥중에서도 조선어 사용 금지 반대, 수감자의 대우 개선, 간수들에 대한 사상고취 등의 운동을 전개해 공주 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형기 만료 이후에도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석방되지 않았다. 1941년 예방 구금 제도의 적용을 받아 청주 보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944년 10월 26일 40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