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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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應俊 |
이칭/별칭 | 추정(秋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나영 |
[정의]
6·25 전쟁 때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에서 전투를 지휘한 군인.
[가계]
이응준(李應俊)은 1890년 8월 12일 평안남도 안주(安州)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처는 이정희(李正熙)로 추정(秋汀) 이갑(李甲)의 딸이다. 맏사위 이형근(李亨根)은 일본 육군 사관 학교 56기로 해방 직전 일본군 소좌까지 진급하였고, 해방 후 미군정의 지원으로 설립된 조선 경비 사관 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다.
[활동 사항]
이응준은 16세에 상경하여 대한 제국 군부대신 이근택의 부관이었던 참령 이갑(李甲)의 집에 머물면서 보성 보통 중학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06년 대한 제국의 육군 무관 학교에 입교해 1년간 수학하였는데, 일제가 대한 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고 무관 학교 학생들을 모두 일본으로 데려갔다. 이에 1912년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입학해 1914년 제26기로 졸업하였고, 동년 12월에 소위에 임관되었다.
1918년 일본군 사령부로 배속되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20사단 장교로 참전하고 일본 육군 대좌[대령]까지 진급하는 한편,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군 지원을 선동하는 등 친일적인 군 생활을 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군사 고문으로 조선 국방 경비대 창설에 참여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초대 육군 참모 총장에 발탁되어 취임 90일 후에 준장으로 진급, 국군에서 최초로 장성이 되었다. 그러나 1949년 2개 대대 병력이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자진 사퇴하였다가, 3사단장으로 발령받았다. 그 후 5사단장으로 전임하여 6·25 전쟁 전까지 광주에서 공비 토벌 작전을 지휘하였고, 전쟁 개전 직후 창동 전투에 참가해 북한 인민군의 서울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예편하였다. 1952년 4월 다시 현역에 복귀하여 육군 대학장·제1훈련소장·육군 참모 차장 등을 거쳐 1955년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55부터 1958년까지 체신부 장관, 1958년 자유당 성북 을구 지구당 위원장, 1967부터 1972년까지 반공 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고, 1979년 국정 자문 위원, 1980년 국방 정책 자문 위원장, 통일원 고문을 지냈다. 1985년 7월 8일 95세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82년 자서전 『회고 90년』을 간행하였다.
[묘소]
1985년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5년 국민 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