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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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鎭洙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나영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의 국회 의원을 지낸 정치인.
[활동 사항]
이진수(李鎭洙)는 함경남도 이원(利原) 출신으로 고향에서 북청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니혼 대학[日本大學] 상학부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교토 제국 대학에서 경제학과 사회학 과정을 수료하였다. 졸업 후 변리사 사무소를 개업해 변리사로 활동했고, 조선 변리사회 회장을 지냈다.
해방 후 독립 정치 경제 문제 연구소를 설립하고 대표직을 지내면서 정치 활동을 펼쳐나갔다. 1947년 이승만이 남한 단독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조직한 한국 민족 대표자 대회의 의원직을 지내기도 했으며,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총선거 대책 위원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48년 현재의 도봉구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헌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경기도 양주군에서 대한 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국회에서는 국회 문교·후생부 위원회, 산업 노동 분과 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이진수는 정치 활동을 하는 동안 집권 여당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자유당이 창당되자 당적을 자유당으로 옮겨 활동했으며, 1953년에는 자유당 중앙당부 훈련부장을 지냈다. 이진수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쿠데타 주체 세력이 민정 이양을 앞두고 1963년 민주 공화당을 조직하자 민주 공화당에 입당하면서 당적을 다시 바꿨다.
한편 이진수는 교육계에서도 활동해, 재단 법인 세화 학원, 서울 약학 대학 이사장을 맡아 교육 진흥에 힘썼다. 경제인으로서도 활동해, 세화 산업, 세화 상사, 세화 토건 주식회사, 세화당 제약 주식회사 대표를 지냈다. 1968년 12월 간암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