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6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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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道峯山詩抄-淑-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여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934년 7월 14일 - 「도봉산 시초 나의 숙에게」 저자 박봉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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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962년 - 「도봉산 시초 나의 숙에게」가 수록된 『신사조』1권 5호 간행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990년 3월 1일 - 「도봉산 시초 나의 숙에게」 저자 박봉우 사망 |
배경 지역 | 도봉산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배경 지역 | 천축사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 1동 549 |
성격 | 시 |
작가 | 박봉우 |
[정의]
1962년 박봉우가 도봉산에 핀 4월의 늦진달래를 소재로 4·19 혁명의 좌절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한 시.
[개설]
「도봉산 시초: 나의 숙에게」는 박봉우가 도봉산과 천축사를 배경으로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의 좌절과 이때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감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4·19 혁명의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과 혼자서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혁명의 이상을 지켜 가야 한다는 의지적인 자세가 드러나는 시이다. 「도봉산 시초: 나의 숙에게」는 1962년에 간행된 『신사조』 6월호에 수록되어 있다.
[구성]
「도봉산 시초: 나의 숙에게」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에서는 도봉산에 핀 진달래를 보며 살아남은 것에 대한 자책과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2]에서는 울고 있는 꽃사슴과 진달래에 대한 형상화를 통해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추모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내용]
[1]에서 시적 화자는 도봉산에 핀 4월의 늦진달래를 바라보고 있다. 화자는 누군가 ‘늙을 줄 모르는/ 푸른 가슴팍’을 가진 굳건한 도봉산과 그 산에 피어 있는 진달래를 믿고 혼자서 살아가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화자에게 도봉과 늦진달래를 믿고 살아가라고 말하는 주체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은 ‘먼지 낀 이름들’로, 4·19 혁명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2]에서 화자는 “도봉산 계곡의/ 흐름속에 별들이 꽃피고/ 밤의 진달래가/ 바람에 향기롭다.”고 하여 사람들의 희생과 그 정신이 아름다운 것임을 말하고 있다. 동시에 구순한 꽃사슴의 피 토하는 울음과 진달래의 울음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정을 보이고 있다.
[Ⅰ]
도봉산(道峰山)/ 늦진달래가 피는/ 사(四)월 마즈막달/ 나혼자 이끼낀 바위턱에 앉아/ 살어라고 한다./ 후미진 계곡을 타고/ 천축사(天竺寺)를 바라보면/ 사(四)월의 늦진달래를 믿고/ 혼자서 살어라고 한다// 도봉산(道峰山)도/ 진달래로, 늙을줄 모르는/ 푸른 가슴팍에/ 먼지낀 이름들이 짓구져/ 머언 도봉(道峰)을/ 보고 나더러 살라한다.
[Ⅱ]
도봉산(道峰山) 계곡의/ 흐름속에 별들이 꽃피고/ 밤의 진달래가/ 바람에 향기롭다.// 멀리선 천축사(天竺寺)/ 풍경소리 들리는듯/ 구순한 꽃사슴의/ 피토하는 울음을 엿듣는다.// 밤이 좋아/ 밤이 좋아/ 진달래도 울고 있다.
[특징]
「도봉산 시초: 나의 숙에게」는 직접적으로 4·19 혁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도봉산에 핀 ‘진달래’와 ‘사월’이라는 시어를 통해 이 시가 4·19 혁명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추모의 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박봉우는 이 시에서 진달래를 4·19 혁명이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도봉산 시초: 나의 숙에게」와 비슷한 시기에 창작된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와 소묘 연작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박봉우는 일련의 시를 통해 4·19 혁명의 감격과 좌절을 노래했는데, 그중 「도봉산 시초: 나의 숙에게」는 5·16 군사 쿠데타로 4·19 혁명의 이상이 좌절된 상황과 4·19 혁명의 주력 계층이었던 어린 학생들의 희생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시적 화자는 희생된 자를 추모하고 혼자서 살아남았음에 대한 죄책감을 보이지만, 동시에 굳건한 도봉산과 진달래꽃이 자신에게 혼자 살아가라고 한다고 말함으로써 좌절로 그치지 않고 4·19 혁명의 이상을 지켜 가야 한다는 의지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