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01 |
---|---|
한자 | 過道峯書院有感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64년 - 「과도봉서원유감」 저자 「과도봉서원유감」 이정구 출생 |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15년 - 「과도봉서원유감」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5년 - 「과도봉서원유감」 저자 이정구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88년 - 「과도봉서원유감」이 수록된 『월사집』 간행 |
배경 지역 | 도봉 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성격 | 한시 |
작가 | 이정구 |
[정의]
1615년 무렵 이정구가 도봉 서원을 방문하고 감회를 읊은 칠언 율시의 한시.
[개설]
「과도봉서원유감(過道峯書院有感)」은 1615년(광해군 7) 무렵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 등과 함께 도봉 서원을 방문하고 나서 느낀 감흥을 적은 한시이다. 「과도봉서원유감」은 이정구의 시문집 『월사집(月沙集)』 권 17에 수록되어 있다.
『월사집』에 실려 있는 이정구의 시는 시기 순으로 편차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창작 연대를 확정할 수는 없으나 그가 도봉 서원을 다녀와서 쓴 기문인 「유도봉서원기(遊道峯書院記)」의 기록에 의거하면 이 시는 1615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유도봉서원기」에 따르면 이정구는 1615년 가을에 이항복, 윤해(尹瀣), 그리고 아들 이명한(李明漢)[1595~1645]과 함께 도봉 서원으로 떠났는데, 이때 도봉 서원의 침류당(枕流堂)을 중건한다는 언급을 하였다. 그런데 「과도봉서원유감」의 제목 뒤에 침류당을 중건한다는 주석을 덧붙여 이 시 또한 같은 시기에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정구의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 등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윤근수(尹根壽)[1537~1616]의 문인으로 1590년(선조 23)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병조 판서·예조 판서와 우의정·좌의정·대제학 등의 벼슬을 지냈다. 중국어에 능하여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의 접대에 활약하기도 하였다.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이상과 이문화국(以文華國)의 관인 문학을 실천하여 정통적인 사대부 문학의 전범(典範)을 보인 결과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 사대가로 칭해졌다. 문집으로는 『월사집』이 전하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구성]
「과도봉서원유감」의 전반부에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 황폐해진 도봉 서원의 모습을 보고 느꼈던 감회를 적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다시 도봉 서원이 개수되고 침류당이 새로 들어선 것에 대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내용]
이십년전부급유(二十年前負笈遊)[이십 년 전 책 상자 짊어지고 노닐어]
일공증답란봉추(一筇曾踏亂峯秋)[지팡이 하나로 일찍이 가을 봉우리 여기저기를 다녔지]
경심묘우봉호참(驚心廟宇蓬蒿慘)[묘우(廟宇)가 잡풀로 우거진 것에 놀랐고]
개안연하수석유(揩眼煙霞水石幽)[연하(煙霞) 속 그윽한 수석(水石)을 눈 비비고 보았지]
가경지금번귀호(佳境祗今煩鬼護)[아름다운 곳 이제 번거로이 귀신의 보호를 받더니]
사문종고계인수(斯文從古係人修)[사문(斯文)은 예로부터 사람 수양하는 것에 힘썼지]
사변좌구중첨앙(沙邊坐久重瞻仰)[물가에 앉아 오래도록 올려다보니]
강희신당이침류(剛喜新堂已枕流)[새 건물이 이미 시내를 베고 있음에 기쁘네]
[특징]
칠언 율시(七言律詩)로서 제1구의 ‘유(遊)’자와 짝수 구절의 ‘추(秋)’, ‘유(幽)’, ‘수(修)’, ‘류(流)’를 운자로 사용하였다. 측기식(仄起式)이며 평성 우운(尤韻)으로 압운(押韻)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정구가 도봉 서원을 두고 쓴 기문인 「유도봉서원기」를 보면 1582년에 이정구가 수몽(守夢) 정엽(鄭曄)[1563~1625]과 함께 도봉 서원에 이르러 독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615년 무렵에 쓴 「과도봉서원유감」의 전반부에서는 20년 전에 다시 도봉 서원에 이르러 독서하였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정구는 1582년뿐만 아니라 그 이후, 즉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 황폐해진 도봉 서원에도 찾았던 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