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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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道峯書院石池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96년 - 「도봉서원 석지기」 저자 윤순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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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30년 - 「도봉서원 석지기」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68년 - 「도봉서원 석지기」 저자 윤순거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741년 - 「도봉서원 석지기」가 수록된 『동토집』 간행 |
배경 지역 | 도봉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성격 | 기문 |
작가 | 윤순거 |
[정의]
1630년 윤순거가 도봉 서원의 돌 받침을 가공하여 석지를 조성하고 지은 기문.
[개설]
「도봉서원 석지기(道峯書院石池記)」는 1630년(인조 8) 조선 후기의 문신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1596~1668]가 도봉서원에 있는 돌 받침[石洀]에 구멍을 내어 석지(石池)를 조성하고 그것에 부친 기문(記文)이다. 「도봉서원 석지기」는 윤순거의 시문집 『동토집(童土集)』 권5에 수록되어 있다.
윤순거의 자는 노직(魯直), 호는 동토,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부친은 대사간을 지낸 윤황(尹煌)[1571~1639]이며, 모친은 성혼(成渾)[1535~1598]의 딸이다. 윤순거는 영월 군수 시절 단종의 기록을 모은 『노릉지(魯陵誌)』를 편찬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나타내고, 또 강항(姜沆)[1567~1618]이 일본에서의 포로 생활 중 견문한 기록을 모은 『간양록(看羊錄)』을 편찬하여 존왕양이(尊王壤夷)[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침]의 정신을 고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서로 『동토집』이 전한다.
[구성]
「도봉서원 석지기」는 윤순거가 도봉서원을 찾아 돌 받침을 보고 그 규모와 유래에 대해 적은 후,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영국사(寧國寺)의 자취인 그 돌 받침을 그곳에 계속 둘 명분이 있는지, 그것을 그냥 둘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적고 있다. 정명도(程明道) 또한 연못을 조성하였던 것을 들어 결국 돌 받침에 구멍을 내어 석지로 조성하기로 하는 경과를 적고 있다.
[내용]
「도봉서원 석지기」는 경오년(庚午年), 즉 1630년에 윤순거가 도봉서원을 찾았을 때 서원 안에서 돌 받침을 처음 보게 되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어 그 돌 받침의 규모와 유래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돌 받침의 높이는 한 척이 못 되었고, 넓이는 한 길 정도 되었으며, 돌 받침 밑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뾰족한 받침 같은 것이 더 있었다.
윤순거는 그것이 도봉 서원이 들어서기 전, 그 자리에 있던 영국사의 남은 자취라 여겨 유원(儒院)에 그러한 물건이 있을 수 있겠냐고 하자 다른 사람들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워낙 무겁고 다루기 쉽지 않아 도봉서원을 창건할 때 남언경(南彦經)도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어쩌지를 못하였을 것이라 하였다. 그 돌 받침은 앉기에도 불편하고 기대자니 흔들려서 쓸데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갈아 없애자니 너무 커서 불가능하고, 찧어 없애기도 불가능했다. 크고 무거운 데다 뿌리가 깊어 뽑을 수도 없고 단단하여 부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고민하는 사이에 윤순거가 묘안을 낸다. 가운데에 구멍을 내는 것이었다. 정명도 또한 뜰 앞에 작은 연못을 파 두고는 물고기 노는 걸 구경하면서 만물의 자득(自得)한 뜻을 보고자 하였다는 전례를 들어 그 돌 받침을 파서 구멍을 내고 연못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장인(匠人)을 불러 사방으로 새끼줄을 묶고 그 가운데를 뚫었다. 다음날 비가 내려 그 구덩이에 물이 차니 매우 맑고 깨끗하였으며,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고, 구름이 끼면 구름 그림자가 드리웠으며, 해가 뜨면 하늘빛이 비쳤다.
[특징]
「도봉서원 석지기」는 일반적인 누정기(樓亭記)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석지’라는 특이한 물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또 작자와 사람들의 문답으로 글을 이어가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도봉서원 석지기」는 비록 기문이기는 하지만, 문답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논변류(論辯類)의 성격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도봉서원 석지기」는 도봉서원의 구조물에 대한 언급이 있어 임진왜란으로 훼손된 도봉서원 경내 구조물들이 17세기 초반, 정확히 말하면 저자인 윤순거가 도봉서원에 다녀와서 이 글을 쓴 1630년에 어떻게 복원되어 있었는지를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윤순거가 강당[繼開堂]과 침류당(枕流堂)을 본 사실을 적고 있는 바, 1630년에 도봉서원 강당이 이미 중건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글은 그동안 도봉서원과 관련하여 알려지지 않았던 돌 받침에 대해 쓴 기문으로, 영국사가 있을 때부터 전해 오던 돌 받침이 어떠한 가공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