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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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道峯書院致祭文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52년 - 「도봉서원 치제문」 저자 정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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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92년 - 「도봉서원 치제문」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00년 - 「도봉서원 치제문」 저자 정조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14년 - 「도봉서원 치제문」이 수록된 『홍재전서』 간행 |
배경 지역 | 도봉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성격 | 제문 |
작가 | 정조 |
[정의]
1792년 9월 12일 정조가 도봉서원에서 제사를 올리게 하며 지은 제문.
[개설]
「도봉서원 치제문(道峯書院致祭文)」은 1792년(정조 16) 9월 10일, 정조(正祖)[1752~1800]가 광릉(光陵)에 참배하러 간 일이 있는데, 이틀 뒤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봉서원을 지날 때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며 직접 지은 제문(祭文)이다. 「도봉서원 치제문」은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권22에 실려 있으며,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靜菴集)』 부록 권1에 「정묘 임자 도봉서원 치제문(正廟壬子道峯書院致祭文)」이라는 제목으로도 수록되어 있다.
정조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로,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인 장헌 세자(莊獻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1776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곧바로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1749~1776]·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하였다. 서얼 통청(庶蘖通淸)에 관심을 갖는가 하면 위항 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개혁뿐 아니라 『일성록(日省錄)』을 편수하게 하고,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케 하였으며,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개혁에 힘쓰며 왕권을 신장해 나갔다. 그는 학자 군주를 표방하였으며, 180권 100책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弘齋全書)』로 간행되어 전한다.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다.
[구성]
정조가 제문을 짓게 된 배경에 대해 서술한 후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기리는 뜻을 담은 4언 8구의 제문을 덧붙였다. 제문은 요순(堯舜)이나 춘추(春秋) 등 유학의 종통(宗通)에 뜻을 두고 그것에 밝았던 두 현인, 즉 조광조와 송시열을 기리는 내용이다.
[내용]
1792년(임자년) 중양절 다음날 아침, 광릉을 참배하기 위해 갈 때의 길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와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의 사당 앞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근신(近臣)을 보내어 양현(兩賢)에게 다음의 글로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벽립지봉(壁立之峯)[절벽이 선 듯한 봉우리]
여적정우(如覿靜尤)[마치 정암과 우암을 보는 듯하네]
지재요순(志在堯舜)[뜻은 요순에 있었고]
의병양추(義炳陽秋)[의(義)는 춘추에 밝았네]
지여인조(地與人遭)[땅이 사람과 만나니]
양현일원(兩賢一院)[두 현인을 한 서원에 제향하네]
광세지상(曠世之想)[광세의 감회가 있어]
효상시천(殽觴是蕆)[안주와 술을 이에 바치네]
[특징]
치제문은 보통 서두에 제사 시기와 제사를 올리게 된 경위에 대해 짧게 서술하고, 이어 4언으로 된 운문으로 죽은 이의 덕이나 산천, 서원과 연고가 있는 이를 기리는 글이다. 「도봉서원 치제문」 또한 일반적인 치제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의의와 평가]
「도봉서원 치제문」은 임금이 도봉서원에 치제(致祭)하게 하면서 직접 지은 것이다. 서원이나 묘당에 대해 임금의 명으로 제사를 올리고 치제문을 짓게 하는 것은 흔했지만 도봉서원에 대해, 그것도 임금이 직접 제문을 지어 올린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글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