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15 |
---|---|
한자 | 道峯路次贈長洲 |
이칭/별칭 | 「도봉으로 가는 도중에 장주에게 주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52년 - 「도봉로차증장주」 저자 정조 출생 |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92년 - 「도봉로차증장주」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00년 - 「도봉로차증장주」 저자 정조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14년 - 「도봉로차증장주」가 수록된 『홍재전서』 간행 |
배경 지역 | 도봉산 만장봉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성격 | 한시|기행시 |
작가 | 정조 |
[정의]
1792년 정조가 도봉산 만장봉 부근에 이르러 동행한 황승원에게 지어 준 칠언 절구의 한시.
[개설]
「도봉로차증장주(道峯路次贈長洲)」는 1792년(정조 16) 9월 10일, 정조(正祖)[1752~1800]가 광릉(光陵)으로 가기 위해 흥인문(興仁門)을 나서 미아리와 도봉산 아래를 지날 때 당시 행차에 대사간으로 동행한 황승원(黃昇源)[1732~1807]에게 지어 준 한시이다. ‘장주(長洲)’는 곧 황승원의 호이다. 정조가 이전에 도봉산 만장대를 두고 지은 「야차제만장봉(野次題萬丈峰)」이라는 시는 정조의 시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권6에 「도봉로차증장주」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정조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로,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인 장헌 세자(莊獻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1776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곧바로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1749~1776]·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하였다. 서얼 통청(庶蘖通淸)에 관심을 갖는가 하면 위항 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개혁뿐 아니라 『일성록(日省錄)』을 편수하게 하고,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케 하였으며,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개혁에 힘쓰며 왕권을 신장해 나갔다. 그는 학자 군주를 표방하였으며, 180권 100책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로 간행되어 전한다.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다.
[구성]
「도봉로차증장주」는 4구로 된 칠언 절구로 도봉산의 산세가 험하고, 특히 만장봉(萬丈峰)은 지척 간에도 천 길이나 떨어진 듯 아찔함을 말하고 있다. 광릉 행차 중이라 만장봉에 오를 수 없으니 황승원에게 이후에 다시 들러볼 것을 기약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만장봉전주마시(萬丈峯前駐馬時)[만장봉 앞에 말을 세울 때에는]
야수건복입연의(也誰巾服入然疑)[누구나 건복 차림으로 들어가길 머뭇거리지.]
지수지척유천리(地雖咫尺猶千里)[땅이 비록 지척이라도 천 리 같으니]
경복춘풍야외기(更卜春風野外期)[또 다시 봄바람 불면 야유를 기약하세나.]
[특징]
제1구의 ‘시(時)’, 제2구에 ‘의(疑)’, 제4구에 ‘기(期)’가 운자로 사용되었으며 평성(平聲) 지운(支韻)으로 압운하였다.
[의의와 평가]
「도봉로차증장주」는 정조가 광릉 행차 중에 도봉산을 지나가며 지은 시 두 수 가운데 하나로, 도봉산 특히 만장봉의 수려함에 대한 감탄과 근신 황승원을 아끼는 마음이 잘 드러난 시이다. 정조는 도봉산 만장봉의 수려함에 감탄하였는데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16년 임자조에 “동북쪽에 절벽이 서 있는 곳이 만장봉인데 수려하고 깨끗한 기상과 천지가 개벽하기 전의 형세로 나는 듯 뛰는 듯하니 매우 볼만하다. 일찍이 풍수가(風水家)의 말을 들어보니 풍수가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매양 기뻐서 춤을 추고 싶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 한 정조의 말을 확인할 수 있다. 「도봉로차증장주」는 만장봉의 수려함에 대한 정조의 감회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