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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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舍弟仲靜-餞送-道峯-離別-臨- |
이칭/별칭 | 「사제중정 송아지도봉 임별서증(舍弟仲靜 送我至道峯 臨別書贈)」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70년 - 「사제 중정이 나를 전송하기 위해 도봉에 이르렀기에 이별에 임해서 써서 주다」 저자 김상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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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05년 - 「사제 중정이 나를 전송하기 위해 도봉에 이르렀기에 이별에 임해서 써서 주다」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52년 - 「사제 중정이 나를 전송하기 위해 도봉에 이르렀기에 이별에 임해서 써서 주다」 저자 김상헌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54년 - 「사제 중정이 나를 전송하기 위해 도봉에 이르렀기에 이별에 임해서 써서 주다」가 수록된 『청음집』 간행 |
배경 지역 | 도봉산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성격 | 한시 |
작가 | 김상헌 |
[정의]
1605년 가을, 김상헌이 경성 판관으로 부임할 때에 도봉산까지 전송 나온 김상복에게 써 준 칠언 절구의 한시.
[개설]
「사제 중정이 나를 전송하기 위해 도봉에 이르렀기에 이별에 임해서 써서 주다」는 1605년(선조 38) 가을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함경도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어 그곳으로 부임하러 가기 위해 서울을 떠날 때, 그를 전송하러 온 아우 김상복(金尙宓)[1573~1652]에게 써 준 한시이다. 이 시는 원제가 「사제중정 송아지도봉 임별서증(舍弟仲靜送我至道峯 臨別書贈)」으로 김상헌의 시문집 『청음집(淸陰集)』 권2에 수록되어 있다.
김상헌의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 또는 석실산인(石室山人) 등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596년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고, 1608년에는 문과 중시에 급제하였다. 대사헌·예조 판서 등을 지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구성]
모두 두 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체로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시 전반에 서정적 표현이 많아 정(情)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다. 첫째 수는 형제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에 아우 김상복이 형 김상헌을 따라 도봉산에까지 이르고 있는 모습을 제시하였다. 둘째 수는 도봉산 아래에서 형제 이별의 참담함을 자연 경물에 이입함으로써 이별의 슬픔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내용]
청문행색석분휴(靑門行色惜分携)[동문 밖으로 길 떠나자 헤어짐이 아쉬워]
상축정안지일서(相逐征鞍至日西)[말 타고 뒤를 따르더니 해가 서산 기울었네]
도처한성편입이(到處恨聲偏入耳)[곳곳마다 한스러운 소리 귀에 들리는데]
협계건엽마번제(夾溪乾葉馬飜蹄)[골짜기엔 낙엽 지고 말은 발길질을 하네]
군마소소아마비(君馬蕭蕭我馬悲)[네 말이 히힝 우니 나의 말도 슬퍼하고]
노기분처경주지(路歧分處更躕踟)[갈림길 나뉜 곳에서 또 다시 머뭇거리네]
추산참담한천인(秋山慘澹寒泉咽)[가을 산은 참담하고 찬 시냇물 흐느끼니]
해후리인거주시(邂逅離人去住時)[헤어진 이 만났다가 이별하는 때라네]
[특징]
첫째 수는 평기식(平起式)의 칠언 절구로, 평성(平聲) 제운(齊韻)으로 압운하였다. 기구(起句)의 ‘휴(携)’, 승구(承句)의 ‘서(西)’, 결구(結句)의 ‘제(蹄)’를 운자로 썼다. 둘째 수는 측기식(仄起式)의 칠언 절구로, 평성 지운(支韻)으로 압운하였다. 기구의 ‘비(悲)’, 승구의 ‘지(踟)’, 결구의 ‘시(時)’를 운자로 썼다.
[의의와 평가]
도봉산은 보통 유람의 대상이 되거나 유원(儒院) 도봉 서원(道峯書院)을 통해 도학(道學) 계승의 의지를 표방하는 징표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김상헌의 「사제 중정이 나를 전송하기 위해 도봉에 이르렀기에 이별에 임해서 써서 주다」는 이별의 장소로서 도봉산이 활용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김상헌의 또 다른 시 「축석령에서 도봉을 바라보다[祝石嶺望道峯]」에서는 도봉산이 도성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징표로 활용되고 있는 바, 서울 동북쪽을 드나들 때 서울을 표상하는 징표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