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20 |
---|---|
한자 | 崇禎六十九年丙子一月道峯書院-並享- |
이칭/별칭 | 「숭정육십구년병자 정월 병향우도봉서원(崇禎六十九年丙子 正月 並享于道峯書院)」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28년 - 「숭정 69년 병자 1월 도봉 서원에 병향되었다」 저자 송환기 출생 |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787년 - 「숭정 69년 병자 1월 도봉 서원에 병향되었다」가 수록된 『송자대전』 간행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07년 - 「숭정 69년 병자 1월 도봉 서원에 병향되었다」 저자 송환기 사망 |
배경 지역 | 도봉 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성격 | 연보 |
작가 | 송환기 |
[정의]
1696년 송환기가 송시열이 도봉 서원에 배향된 경위를 기록한 글.
[개설]
「숭정 69년 병자 1월 도봉 서원에 병향되었다」는 1696년(숙종 22)에 송시열의 5대손 송환기(宋煥箕)[1728~1807]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도봉 서원에 배향된 경위에 대해 정리한 연보(年譜)이다. 이 글의 원제는 「숭정육십구년병자 정월 병향우도봉서원(崇禎六十九年丙子 正月 並享于道峯書院)」으로 송시열의 시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典)』 부록 제11권에 수록되어 있다. 송시열의 연보는 송시열의 손자 송주석(宋疇錫)[1650~1692]이 5책으로 편차한 것을 송시열의 증손 송무원(宋婺源)이 다시 정리해 활자로 간행하였는데, 『송자대전』을 간행할 때 이것을 송환기가 이후의 기사를 보충하고 체제를 다시 정리하여 수록한 것이다.
송시열의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김장생(金長生)[1548~1631]과 김집(金集)[1574~165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674년 효종 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하자 그 또한 파직, 삭출되어 유배 생활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자 그도 다시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으며, 조선 후기에 걸쳐 서인 세력의 핵심 인물로 추숭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환기의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성담(性潭) 등이며, 본관은 은진이다. 송시열의 5대손으로 예조 참판 등을 지냈다. 문집으로 『성담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구성]
「숭정 69년 병자 1월 도봉 서원에 병향되었다」는 송시열의 도봉 서원 병향(幷享)을 두고 일어난 갑론을박을 차례로 제시하고, 송시열이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함께 도봉 서원에 병향되게 된 경위를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기사는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기익(李箕翊)[1654~1739] 등의 병향 청원→ 숙종이 송시열의 도봉 서원 병향을 명함→ 병향에 반대하는 이들의 상소→ 결단성이 부족한 숙종의 태도→ 그 사이에 병향이 마무리됨.”과 같은 순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정에서 송시열의 도봉 서원 병향과 관련하여 벌어진 논쟁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고 있다.
[내용]
관학 유생 이기익 등이 상소하여 송시열의 억울함을 변론하고 송시열을 도봉 서원에 배향할 것을 청하자, 숙종이 예조(禮曹)에 송시열을 도봉 서원에 병향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때 이제억(李濟億)·박해(朴繲) 등이 계속 상소하여 병향을 반대하였으나 숙종이 배척하여 이제억을 원배(遠配)하고 박해를 정배(定配)하라 명하였다. 이어서 민진형(閔震炯)[1662~?]·윤지선(尹趾善)[1627~1704] 등이 상소하여 도봉 서원이 설립된 이후 도덕(道德)이 조광조와 함께 배향될 만한 후학이 한둘이 아니라 하자 숙종이 그 말을 그럴싸하게 여기고는 의논이 통일되지 않으니 우선 송시열의 병향을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비답한다. 이에 승정원에서, 배향하는 예가 이미 며칠 전에 끝났다고 하자 숙종이 다시 병향을 중지하라는 명을 분부하지 말라고 한다. 결국 송시열의 도봉 서원 병향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숙종이 송시열의 도봉 서원 병향에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자 관학 유생 등이 그를 문제 삼는 등 여파가 계속되었다는 말로 글을 맺고 있다.
[특징]
송시열의 도봉 서원 병향과 관련하여 벌어진 다양한 이들의 상소 내용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연보는 특정한 시기에 벌어진 사건을 간략하게 서술하거나, 그 사건이 중요한 것일 때에는 사람들의 말을 다소 장황하게 인용하기도 하는데, 송시열 연보의 이 기사는 여러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비교적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의의와 평가]
송시열의 도봉 서원 병향과 관련하여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이 논쟁하였는데, 이 짧은 기사에서 송시열의 도봉 서원 병향에 대해 이루어진 논쟁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어 송시열의 도봉 서원 병향의 경위를 핵심적으로 파악할 만한 자료이다. 다만, 송시열의 연보에 속해 있는 기사이기 때문에 다분히 송시열 측의 입장에 서서 기술하였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