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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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州-樓院-姜景醇- |
이칭/별칭 | 「양주루원 차강경순운(楊州樓院 次姜景醇韻)」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인규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420년 - 「양주의 누원에서 강경순의 운에 차하다」 저자 서거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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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488년 - 「양주의 누원에서 강경순의 운에 차하다」 저자 서거정 사망 |
배경 지역 | 누원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 1동 340 |
성격 | 한시|칠언 절구 |
작가 | 서거정(徐居正)[1420~1488] |
[정의]
조선 전기 서거정이 양주의 누원에서 강희맹의 운에 차하여 읊은 칠언 절구의 한시.
[개설]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집현전 박사, 대사헌, 대제학,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문집인 『사가집(四佳集)』을 비롯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 『필원잡기(筆苑雜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등 여러 저술이 있다.
「양주의 누원에서 강경순의 운에 차하다」는 『사가시집(四佳詩集)』 제8권에 수록되어 있다. ‘경순(景醇)’은 조선 전기의 문인인 강희맹(姜希孟)[1424~1483]의 자(字)이다. 서거정은 강희안(姜希顔)[1417~1464]·강희맹 형제와 매우 친분이 있었다. 『사가시집』에는 서거정이 젊었을 때부터 강희맹과 교유한 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서거정은 누원점(樓院店)에서 강희맹의 운에 차하여 4수의 「양주의 누원에서 강경순의 운에 차하다」를 지었다. 조선 시대에 함경도 원산에서 강원도 철원을 거쳐 포천에서 다락원을 통해 서울로 가는 상품 교역의 길이 번창하였는데, 서울로 들어서는 관문인 이곳에 누원점이라는 상점이 생기게 되면서 다락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곳 다락원에는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의 물품이 집하되어 서울로 반입되면서 중간 상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구성]
「양주의 누원에서 강경순의 운에 차하다」는 칠언 절구 4수로 구성되어 있는 한시이다. 첫 번째 수는 비가 온 뒤 푸르러진 여름 들판에 열매 맺힌 매실과 살구를 보며 그림과 같은 강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러한 감흥을 시로 표현하여 값진 시어를 얻어 내었음을 이야기하였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지켜보며 낭만과 흥취에 대해서 시를 통해 직접적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적극적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두 번째 수에서는 사립문이 닫히고 버드나무와 꽃이 핀 마을에 저녁 무렵 지친 나그네와 나귀가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다리 아래 흐르는 물에 비친 달을 바라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나그네의 외로운 여정을 묘사함에 있어 적막함까지도 느껴진다.
다음으로 세 번째 수에서는 작가가 있는 도봉산 누원(樓院)의 모습을 시각적이며 촉각적인 표현을 통하여 그윽하고도 청아한 정감으로 독자에게 제시하였다. 이전에 자주 찾았던 장소였음을 회상하고서 즉시 현재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 마지막 수는 누각의 높은 모습과 무수히 솟아 무더기를 이룬 청산의 모습을 묘사하고서,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그득하지만 이미 늙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하여 대비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
[내용]
1.
소우평교록점균(小雨平郊綠漸勻)[비 조금 내려 들판은 점점 푸르러 가는데]
강매이자행초인(江梅已子杏初仁)[매실은 이미 열매 맺었고 살구는 맺기 시작하네]
강산십리진여화(江山十里眞如畫)[십 리 강산이 참으로 그림과 같아서]
사출신시자자진(寫出新詩字字珍)[새로운 시 지어 내니 글자마다 보배롭구나]
2.
수가리락엄시문(誰家籬落掩柴門)[뉘 집의 울타리 사립문을 닫았는가]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버들 우거지고 꽃 환하게 핀 또 하나의 마을이구나]
일모건려부지처(日暮蹇驢不知處)[날 저물고 지친 나귀로 갈 곳을 모르는데]
소교류수월명흔(小橋流水月明痕)[자그마한 다리 아래 흐르는 물엔 밝은 달이 비치네]
3.
도봉산하일정려(道峯山下一精廬)[도봉산 아래 깨끗한 정사 하나]
만학송풍만뢰허(滿壑松風萬籟噓)[골짜기 가득 솔바람이 오만 데서 불어오네]
이십년전독서처(二十年前讀書處)[이십 년 전 글을 읽던 곳인데]
지금여몽우비여(祗今如夢又非歟)[다만 지금은 꿈인 듯 꿈이 아닌 듯]
4.
거주고루일소개(擧酒高樓一笑開)[높은 누각에 올라 술잔 들고 한번 활짝 웃노라]
청산무수촉성퇴(靑山無數矗成堆)[무수한 청산은 우뚝 솟아 무더기를 이루었네]
십년공부귀래흥(十年空賦歸來興)[십 년 동안 부질없이 귀래의 흥취만 읊었더니]
백발다정고고최(白髮多情故故催)[백발은 다정하여 자꾸만 재촉하네]
첫째 수의 “강매이자행초인(江梅已子杏初仁)[매실은 진작 열매 맺었고 살구는 열매 맺기 시작하네]”이라는 구절에서 계절적인 배경이 7~8월 즈음인 것을 알 수 있다. 네 번째 수 전구(轉句)의 ‘귀래(歸來)’는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도잠(陶潛)[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말로, 관직을 그만두고 자연으로 돌아가 은거하고 싶은 작가의 심정이 드러나 있다.
[특징]
「양주의 누원에서 강경순의 운에 차하다」는 『사가시집보유(四佳詩集補遺)』의 제3권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되어 있는 「양주덕해원(楊州德海院)」 2수를 포함하여 7언 절구 4수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 수 결구(結句)의 ‘횡수(橫水)’는 「양주의 누원에서 강경순의 운에 차하다」에 ‘유수(流水)’로 되어 있다. 첫째 수는 평성 ‘진(眞)’ 운으로 운자는 ‘균(勻)’, ‘인(仁)’, ‘진(珍)’이다. 둘째 수는 평성 ‘원(元)’ 운으로 운자는 ‘문(門)’, ‘촌(村)’, ‘흔(痕)’이다. 셋째 수는 거성 ‘어(御)’ 운으로 운자는 ‘허(噓)’, ‘여(歟)’이다. 마지막 네 번째 수는 평성 ‘회(灰)’ 운으로 운자는 ‘개(開)’, ‘퇴(堆)’, ‘최(催)’를 썼다.
[의의와 평가]
서거정은 시집 52권에 총 1만여 수의 방대한 양의 시를 지은 작가로, 별다른 꾸밈없이도 고요하고 한가로운 자연 경관을 지극히 드러내었다. 그러나 과도한 용사(用事)와 타인의 시어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양주의 누원에서 강경순의 운에 차하다」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볼 수 있는데, 둘째 수의 승구(承句)는 중국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1125~1209]의 7언 율시 「유산서촌(遊山西村)」의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버들 우거지고 꽃 환하게 핀 또 하나의 마을이네]’이라는 구를 그대로 끌어다 쓰고 있다. 이 구는 마을의 원경을 묘사한 것으로 산이 거듭되고 물이 막히어 사람 사는 마을을 찾아볼 수 없다가 갑자기 버들이 우거지고 꽃이 환하게 핀 마을을 발견한 기쁨을 읊은 것이다. 암울한 현실일지라도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려 보면 헤쳐 나갈 길이 있음을 말하는 것인데, 서글픈 노정(路程)을 읊고 있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 「양주의 누원에서 강경순의 운에 차하다」와는 전혀 어울릴 수 없다. 더욱이 해가 지고 달이 뜬다는 ‘일모(日暮)’, ‘월명(月明)’이라는 시어와는 시제조차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서거정은 남의 시에 차운(次韻)하고 있으면서 타인의 시에서 절취하여 자신의 시로 조립해 두어 무절제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