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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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今璇 |
이칭/별칭 | 남해(南海)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나영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있는 덕성 여자 대학교의 전신인 덕성 여자 초급 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낸 교육인.
[가계]
송금선(宋今璇)은 1905년 1월 15일 서울의 양골[陽洞]에서 송우영(宋禹榮)과 김명운(金明雲)의 장녀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송금선은 1929년 박준섭(朴俊燮)과 결혼하여 슬하에 박원국(朴元國)·박원영(朴元榮)·박원택(朴元澤)·박원경(朴原炅) 등 4남을 두었다.
[활동 사항]
송금선은 1919년 숙명 여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도쿄 여자 고등 사범 학교에 입학해 1925년에 졸업하였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송금선은 1925년 숙명 여자 고등 보통학교 교사로 임용되었다. 1926년 진주 일신 여자 고등 보통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29년 동덕 여자 고등 보통학교로 근무지를 옮겼다. 1934년에 이화 여자 전문학교 가사과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송금선은 일제 강점 말기 여성 대표로서 많은 친일 단체에 가담해서 활동하였다. 1937년 조선 총독부 학무국이 조직한 친일 여성 단체인 조선 부인 문제 연구회에 이사로 취임하였고, 1938년부터는 이 단체의 순회강연반에서 연사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37년 조선 총독부 사회 교육과에서 조직한 친일 기구 방송 선전 협의회에서 부인 강좌를 담당했으며, 같은 해 일제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은 인사들의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조직된 애국 금차회(愛國金釵會) 간사로 참여하였다.
또한 1939년에는 전국 순회강연을 위해 각 도에 파견된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여성 강연단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에는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이 국민 총력 조선 연맹으로 개편된 후에는 연성부(鍊成部) 연성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1년에는 임전 대책 협의회가 주관한 가두 채권 판매에 참여하였다. 이밖에도 1942년에는 조선 임전 보국단 부인대의 지도 위원으로, 1945년에는 조선 언론 보국회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송금선은 조선 총독부 산하의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1941년 창간된 친일 잡지 『신시대』에 학생들의 전쟁 동원을 선동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으며, 후쿠자와 레이코[福澤玲子]로 창씨개명하였다.
한편 송금선은 아버지 송우영과 함께 총독부의 지지 하에 교육 기관 인수에도 나서, 여성 독립운동가 차미리사(車美理士)가 설립한 재단 법인 덕성 학원을 장악해 나갔다. 1940년 차미리사가 조선 총독부의 압력으로 덕성 여자 실업 학교 교장에서 사임하게 되자, 같은 해 덕성 여자 실업 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1950년에 현 덕성 여자 대학교의 전신인 덕성 여자 초급 대학을 운현궁에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1952년 차미리사가 덕성 학원 재단 이사장에서 사임하자 송우영이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70년 덕성 학원 3대 이사장을 맡았던 남편 박준섭이 사망하자, 송금선이 4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1972년 유신 체제 하 대통령을 간접 선출하기 위해 조직된 통일 주체 국민 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성북구 제10선거구에서 제1대 대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87년 10월 2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택에서 노환으로 83세에 사망하였다.
송금선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 의원 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의 명단과, 2009년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묘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 선영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74년 국민 훈장 동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