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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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昶 |
이칭/별칭 | 경용(景容),석천(石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향주 |
[정의]
도봉 서원 건립 후 율곡 이이로부터 「도봉 서원기」를 받아 온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용(景容), 호(號)는 석천(石泉). 증조할아버지는 종사랑(從仕郞) 안자함(安子諴), 할아버지는 안순(安恂), 아버지는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안방경(安方慶)이다. 안방경은 영흥 부사(永興府使) 등을 역임하고 명종(明宗)조에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숭불 정책(崇佛定策)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어머니는 장흥고령(長興庫令) 박형언(朴亨彦)의 딸 순천 박씨(順天朴氏)이다. 처는 유순(兪洵)의 딸 기계 유씨(杞溪兪氏)이다. 아들은 안홍량(安弘量)과 안홍중(安弘重)이다. 안홍량이 선조(宣祖)의 아들인 신성군(信城君)의 사위가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왕실(王室)의 사돈이 되었다.
[활동 사항]
1573년 양주 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지역 유생들의 중지(衆志)를 모아 도봉 서원을 건립하자, 안창(安昶)은 그와 뜻을 함께하고 서원 건립 과정에 참여하였다. 도봉 서원이 완비된 1579년에는 낙성식(落成式)에 앞서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 「도봉 서원기(道峯書院記)」를 요청하고 기문(記文)을 받아왔다. 당시의 정황은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3, 「도봉 서원기」에 “기묘년[1579년]에 비로소 공사를 잘 끝냈는데 원유(院儒)인 안창이 여러 선비의 청이라며 이(珥)에게 기(記)를 구하니……”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후 안창은 1589년 설행된 증광시(增廣試)에서 생원시·진사시를 모두 합격하였는데, 생원시 3등 22위, 진사시 3등 41위로 급제하였다. 이로부터 5년 뒤인 1594년에는 별시(別試)에 병과(丙科) 5위로 급제하여 형조 좌랑(刑曹佐郞)·군자부정(軍資副正)·영천 군수(永川郡守)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결성 현감(結城縣監)으로 재직하던 1603년에는 선조의 친손녀를 아들 안홍량의 배필로 맞아들이면서 혼사의 편의를 위해 경직(京職)인 사섬시 부정(司贍寺副正)을 제수받았으나, 사헌부(司憲府)의 반대로 통천 군수(通川郡守)에 임명되었다. 이후 안창은 선조의 특지(特旨)로 회양 부사(淮陽府使)·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전보(轉補)되었고, 종부시정(宗簿寺正)·공주 목사(公州牧使) 등을 두루 역임한 뒤, 광해군(光海君)의 즉위 후에는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부임하였다.
1613년 평소 친밀하게 교유해 오던 김제남(金悌男)이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사되자, 안창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삭직(削職)을 당하였다. 이후 전원(田園)으로 돌아가 과천(果川)에 초당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만년을 보냈다. 1620년 3월 24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69세였다.
[묘소]
양주의 선대 묘역에 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