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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위례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286
한자 河北慰禮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홍기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도성

[정의]

백제 시대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도성.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 백제조에 의하면, “고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 3년 계묘[기원전 18]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을 칭하였다[按古典記,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本扶餘至慰禮城, 立都稱王]”라고 하였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4년[기원전 5]조에 “어제 나아가 한강의 남쪽을 둘러보았는데, 땅이 기름져서 마땅히 거기에 도읍을 정하고 길이 편안할 계책을 도모할 것이다. 7월에 한산(漢山)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겼다[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郡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戶]”라고 되어 있다.

즉 두 기록에 의하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은 기원전 18년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기원전 5년 한강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음을 알 수 있다. 2개의 도성을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처음 정한 도성을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천도한 곳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고 부른다.

[내용]

온조가 처음 정착한 도성의 위치에 대해 고려·조선 시대 학자들은 오랫동안 위례를 직산(稷山)으로 비정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 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의 기록을 바탕으로 충청남도 직산의 위례산성에 주목해 왔다. 하지만 정약용(丁若鏞)은 직산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남쪽으로 강을 건너 도읍을 옮겼다는 『삼국사기』에 주목하여 하북위례성의 위치를 한강 이북에 비정하였다.

정약용은 서울 혜화문(惠化門)의 약 3.93㎞[10리] 지점인 삼각산 동쪽 기슭의 한양동(漢陽洞)에 옛 성터가 남아 있는 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 일대를 한양 고현(漢陽古縣)이라 부르는 점 등을 근거로 이 일대를 하북위례성으로 비정하였다. 혜화문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으므로 정약용이 비정한 위치는 오늘날의 성북구와 도봉구 일대로 볼 수 있다.

정약용의 연구를 기점으로 백제의 첫 도읍지를 한강 이북에서 찾으려는 연구가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서울 세검정, 중랑천 일대, 상계동, 우이동 등 여러 설이 제기되어 왔다. 최근에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서울 연산군 묘 인근에 있는 방학동 토성(放鶴洞土城)을 하북위례성으로 보는 견해도 나왔다.

하지만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 토성(風納土城)·몽촌 토성(夢村土城)에 견줄 만한 도성 유적이 아직까지 한강 이북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어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가 어렵다. 또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하북위례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백제가 처음부터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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