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한성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319
한자 漢城府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류정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895년 윤5월 1일연표보기 - 칙령 제98호에 따라 도봉 지역을 관할하던 양주군이 한성부에 편입됨
폐지 시기/일시 1896년 8월 4일연표보기 - 칙령 제36호에 따라 도봉 지역을 관할하던 양주군이 경기도에 편입됨
성격 행정 구역

[정의]

1895년 5월부터 1896년 8월까지 서울특별시 도봉 지역이 소속된 양주군의 상위 행정 기관.

[개설]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로 전국을 23개의 부(府)로 개편하면서 한성과 인근 10개 군(郡)을 합쳐 한성부(漢城府)로 편성하였는데, 이때 양주군한성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1부 13도제(道制) 시행으로 경기도가 부활하면서 양주군은 다시 경기도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변천]

조선 시대의 한성부는 백악산·낙산·목멱산·인왕산을 잇는 18㎞의 도성 안과 성 밖 약 1.96~3.93㎞[5~10리] 이내의 지역[성저 10리]을 포함하고 있었다. 한성부 내 행정 구역은 5부(部) 52방(坊)으로 설정되었다. 우선 크게 중부·동부·서부·남부·북부로 나뉘고, 각 부마다 8~12개의 방이 있었다.

이 중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방은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이었는데, 이들 방에 소속된 계(契)[방의 하위 행정 단위]의 명칭에서 성북구와 강북구, 동대문구 등에 속한 동의 지명은 나타나나 도봉구의 쌍문동, 방학동, 창동, 도봉동 등에 해당하는 명칭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 시대 도봉구 지역은 한성부의 관할 구역인 성저 10리와 바로 이웃해 있으나 양주목(楊州牧)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6월 군국기무처가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던 갑오개혁은 지방 제도까지 개혁을 시도하였다. 우선 중앙 관제를 고치면서 한성부 직제도 수정하였는데, 조선 시대 육조(六曹)의 판서(判書)와 동격이던 한성 판윤을 한 등급 격하시켰다. 즉, 육조 판서 중앙 관제 개혁 후 각 아문의 대신이 종1품 칙임관이었는 데 비해 한성 판윤은 종2품 칙임관이 되었다. 또, 종전까지 한성 판윤의 보조자이던 소윤(小尹)을 3품 주임관인 부윤(府尹)으로 개칭하여 한성부 행정 책임자로 격하시켰다. 또한 기존 한성부는 형조·의금부와 함께 소송 사무도 관장하였는데, 이것을 모두 경무청으로 이속시켰다.

지방 제도 개혁이 본격적으로 단행된 것은 을미개혁 때이었다.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를 발표하여 종래의 8도제를 23부제(府制)로 바꾸고, 도 아래의 부·목(牧)·군(郡)·현(縣) 등 다양하고 복잡하게 편제되어 있던 지방 행정 조직 체계를 군으로 통일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을 23개의 부로 나누어 전국 337개의 군을 23개부의 관할 하에 소속시켰고, 부에는 관찰사를 두고 군에는 군수를 두어 행정 사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이 같은 개혁에 따라 한성부에서는 도봉구 지역이 소속되어 있는 양주군을 포함하여 광주군(廣州郡)·적성군(積城郡)·포천군(抱川郡)·영평군(永平郡)·가평군(加平郡)·연천군(漣川郡)·고양군(高陽郡)·파주군(坡州郡)·교하군(交河郡)을 관할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지방 제도에 대한 전격적인 개혁 조치는 지방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특히 같은 해에 있었던 명성 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으로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일어났고, 관찰사와 군수는 이들에게 표적이 되었다. 지방의 혼란이 극에 달하자 지방 민정을 수습하기 위해 옛 제도를 복구시키는 방안이 모색되었는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인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를 발표하여 1부 13도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1부 13도제는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 3도는 예전과 같이 1도로 하고 나머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함경도 등 5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총 13도로 하였다. 또 한성부 5서(署) 구역만 특별히 1개부를 두어 수부(首部)로서 독립시켰다. 각 도에는 관찰사를 두고, 한성부에는 판윤을 두었는데, 관찰사와 한성 판윤은 동격으로 취급되었고, 내부대신의 일반적인 지휘 감독과 각부 대신의 소관별 감독을 받았다. 이와 같은 제도 변화로 갑오개혁 때 한성부에 소속되었던 양주군은 다시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