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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454
한자 王聃
이칭/별칭 순녕군(順寧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우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91년 - 왕담 견주에 유배
성격 왕족
성별
본관 개성

[정의]

지금의 도봉구 지역인 견주로 유배되었던 고려 후기의 왕족.

[가계]

왕담(王聃)현종[재위 1009~1031]의 14세손으로, 문종과 함께 원혜 왕후(元惠王后) 김씨(金氏)의 소생인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이다. 영복군(永福君) 왕격(王鬲)과는 형제이다.

[활동 사항]

왕담은 『고려사(高麗史)』에서만 소략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 인물이다. 당시 왕담유백순(柳伯淳) 등과 위화도 회군을 주도한 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나누었던 것이 발각이 되어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이들에 대한 국문은 대성(臺省)과 형조(刑曹)가 자은사(慈恩寺)에 모여 진행하였다. 고문을 당한 끝에 유백순이 자백하기를, 자신과 왕담이 위화도 회군 주도파를 비판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권력을 부리며 농간하고 있다고 말을 나누었다고 하였다.

왕담도 이 일에 대해 자복하니, 대성과 형조에서는 죄를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종실이라는 이유로 공양왕왕담견주(見州)에 유배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시켰다. 이듬해인 1392년(공양왕 4)에 왕담은 더 먼 곳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는 『고려사』 우현보(禹玄寶) 열전에 따르면, 조선 개국 주도 세력이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한 후 우현보 등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면서 내려진 조치였다.

조선이 개국된 이후 왕담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해 주는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세종실록(世宗實錄)』 1428년(세종 10) 3월 22일 기록에서 왕담의 아내가 다른 왕씨(王氏)들과 함께 안망지(安望之)라는 사망한 관료의 아내 허씨(許氏)와 재산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었음이 보인다. 안망지의 아들은 세종의 딸 정의 공주(貞懿公主)와 혼인해 도봉구에 묘역이 있는 안맹담(安孟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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