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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464
한자 徽順公主
이칭/별칭 휘신공주(徽愼公主),이수억(李壽億)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95년연표보기 - 휘순공주 생
혼인 시기/일시 1501년 - 휘순공주 구문경과 혼인
활동 시기/일시 1506년 - 휘순공주 중종반정으로 폐서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06년 - 휘순공주 구문경과 이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08년 - 휘순공주 구문경과 재결합
묘소|단소 휘순공주 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지도보기
성격 왕족
성별
본관 전주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연산군의 딸.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수억(李壽億). 출가 이후 휘신공주(徽愼公主)로 봉호를 개칭하였다. 조선의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녀이다.

[활동 사항]

휘순공주(徽順公主)는 1501년(연산군 7) 구수영(具壽永)의 넷째 아들 구문경(具文璟)과 혼인하였고, 이에 따라 구문경능양위(綾陽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연산군휘순공주가 출가할 집을 지어 주도록 하였으며, 이후에도 평시서(平市署)가 휘순공주의 집을 압박하자 그 터를 공주에게 주고 평시서를 옮기도록 한 바 있다. 휘순공주에 대한 연산군의 계속된 특혜는 연이어 논란거리가 되었다.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한 임희재(任熙載)의 처 구순복(具順福)은 구문경의 누이였는데, 본래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노비가 되기로 하였던 것을 휘순공주의 뜻을 보아 특별히 놓아 주기도 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연산군이 폐위되자 중종휘순공주구문경의 직첩을 거두고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또한 연산군 재위 시 공주에게 사급(賜給)하였던 물건 및 가사(家舍)와 전민(田民)을 아울러 속공(屬公)시키도록 하였는데, 휘순공주의 집은 중종반정의 공신 박원종(朴元宗)에게 넘어갔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던 시아버지 구수영연산군과 절혼(絶婚)할 것을 청하여 휘순공주구문경과 이혼하게 되었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구수영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바 있으며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구문경으로 하여금 절혼하게 했다고 비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08년 정광필(鄭光弼)은 경연에서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부부된 자가 비록 난신 자녀(亂臣子女)에 들었다 할지라도 차마 이별시키지 못했다고 하며, 휘순공주의 이혼이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어 유순(柳洵)은 출가한 딸은 그 친부 쪽의 죄에 연좌시키지 않는 뜻이 매우 분명하고, 당시 이혼이 변란을 만나 부득이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니 휘순공주 부부를 다시 합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중종휘순공주 부부를 다시 합하도록 하였으며, 반정 당시 가사를 모두 몰수하였으므로 빈 집을 사급하여 주거나 그 값을 계산하여 면포를 주도록 하였다.

[묘소]

우이 계곡 입구에서 방학 사거리 방향으로 방학로를 따라가면 고개를 넘어서기 전 좌측에 연산군 묘가 위치해 있다. 묘역에는 총 5기의 묘가 있는데, 최상단에 연산군거창 군부인 신씨의 묘가 조성되어 있고, 그 하단에 의정궁주(義貞宮主)의 묘가 있으며, 최하단에 구문경휘순공주의 묘가 쌍분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의정궁주태종의 후궁으로 자식이 없어 휘순공주의 어머니 거창군부인 신씨의 외할아버지인 임영대군이 제사를 맡은 인물이다. 묘표 2기, 혼유석 2기, 상석 2기, 향로석, 문인석 등의 석물과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망주석, 장명등 등이 갖추어져 있다. 묘표는 운수형으로 ‘능성구공지묘(綾城具公之墓)’, ‘전주이씨지묘(全州李氏之墓)’라 쓰여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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