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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492
한자 李璆
이칭/별칭 임영 대군(臨瀛大君),헌지(獻之),정간(貞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1-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우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18년연표보기 - 이구 생
활동 시기/일시 1430년 5월 17일 - 이구 성균관 입학
몰년 시기/일시 1469년 1월 21일연표보기 - 이구 졸
묘소|단소 이구 묘소 -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31
묘소|단소 이구 후손 묘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1-1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이구 사당 - 경기도 의왕시내손동 산154-1
성격 왕족
성별
본관 전주(全州)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후손의 묘역이 있는 조선 전기 왕족.

[개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1418~1469]의 큰아들인 이주(李澍) 후손의 묘소가 있다. 이 지역은 원래 세종이 넷째 아들인 이구에게 하사하였던 토지로서, 세종은 18남 4녀에 달하는 자식들의 혼인 시 노비와 토지 등을 내렸다고 전한다. 이구의 외손녀이며 연산군의 왕비였던 거창군(居昌郡) 부인 신씨(愼氏)연산군의 합장묘[서울 연산군 묘] 역시 이곳에 있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헌지(獻之). 어머니는 소헌 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며, 부인은 우의정 남지(南智)의 딸인 의령 남씨(宜寧南氏)이다. 후에 봉례(奉禮) 최승령(崔承寧)의 딸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를 재취로 맞이하였다. 아들은 9명으로 이주·이준(李浚)·이순(李淳)·이정(李淨)·이징(李澄)·이함(李涵)·이인(李潾)·이탁(李濯)·이옥(李沃)이다.

[활동 사항]

이구는 1430년(세종 12) 5월 17일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 해 12월 3일 임영 대군에 봉해졌으며, 1442년(세종 24) 7월 3일 원윤(元尹)에 봉해졌다. 실록에 의하면 이구는 “천성(天性)이 활달하고 물리(物理)에 정통하며 무예(武藝)가 절륜(絶倫)한 데다가 문사(文史)를 섭렵”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세조도 “유자(儒者)의 풍도(風度)가 있다.”며 칭찬하였다. 세종은 1445년(세종 27) 3월 이구에게 제작을 감독하게 하여 화포(火砲) 개량의 책임을 맡겼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200~300보 정도의 사정거리를 지녔던 당시의 화포가 이구의 개량 사업 이후 800~900보를 넘어 1,000보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세종은 이에 대하여 크게 만족감을 표하였다.

그의 이러한 경험은 훗날 문종 대에도 활용되었다. 이구는 화차를 개조하였는데, 신기전[中神機箭] 100개 혹은 사전 총통(四箭銃筒) 50개를 꽂아 연사할 수 있었고 이동에도 편리하였다고 한다. 1451년(문종 1) 2월 13일 문종이구가 개조한 화차(火車)를 시험하고 서울과 평안도, 함길도 등에서 만들어 쓰게 하였다. 이구는 또한 수양 대군(首陽大君)[세조]과도 각별한 친분을 유지하였다. 세조의 즉위 시부터 그를 보좌하여, 세조의 재위 기간 내내 크게 우대를 받았다.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세종세조이구의 집 행차 기록은 이구와 이들의 각별한 관계를 보여 준다.

[묘소]

묘는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154-1번지 능안 마을 뒤쪽 모락산 중턱에 있다. 묘역은 3단으로 상단에 봉분과 비석이 있으며, 봉분 주변에 호석이 있다. 봉분 중단에는 상석과 망주석, 장명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이구가 사망하자 예종이 매우 슬퍼하며 5일 동안 조회를 철폐하도록 하고 부의(賻儀)로 쌀 70석과 콩 30석을 보냈다. 시호를 정간(貞簡)이라 하였는데, 청백(淸白)하고 절의(節義)를 지킨 것을 정(貞)이라 하고, 공경(恭敬)하고 선(善)을 행한 것을 간(簡)이라고 한다. 묘소 옆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사당이 있다. 음력 정월 21일 낮 12시에 제향을 하며 전국에서 후손들이 참여한다. 임영 대군 이구 묘역 및 사당은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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