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송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20
한자 宋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우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178년 7월연표보기 - 송저 정중부와의 갈등으로 파면
출생지 송저 출생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양주(楊州)
대표 관직 판예빈 성사

[정의]

고려 후기 도봉구 지역이 포함된 견주 출신의 문신.

[개설]

견주(見州)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고려 시대 행정 구역으로서 현재의 도봉구 지역이 속해 있었다. 송저(宋詝)는 고려 의종(毅宗) 대부터 명종(明宗) 대 무렵에 활동하였던 문신 관료였다. 다사다난하였던 그의 삶을 통해 무신 정권기 초기의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송저에 대한 자료는 주로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편년화 된 자료가 많지 않아 정확한 시점을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고려사』에 열전이 실려 있어 주요한 사건들을 알 수 있다.

[활동 사항]

송저(宋詝)[?~?]의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가 된 것은 의종 대였으며, 이후 비교적 평탄하게 관료 생활을 하였던 것 같다. 1170년(의종 24) 무신 정변이 발발하였으나 평소 사람들에게 거슬리지 않았기 때문에 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1178년(명종 8) 정중부(鄭仲夫)의 가노(家奴)가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하였다가 정중부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을 당하였다. 이후 위위경(衛尉卿)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뒤에 서북 병마사로 부임하였을 때 다시 문제가 생겼다.

당시 무신들이 지방관으로 임명되던 추세 속에서 의주 지역에도 무관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금나라의 외교 통로였기 때문에 문서 작성을 위해 문관이 필요하였다. 문관과 무관이 함께 배치되자, 지역민들이 그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 송저에게 호소를 하였다. 이에 송저가 의주 일대를 둘로 나누어 문관으로 의주 분도관(義州分道官)을 삼아 영주·위원진을 예속시키고 무관으로 정주 분도관(靜州分道官)을 삼아 인주·용주를 예속시키자고 건의하였다. 명종은 이 건의를 수용하였는데, 무신들은 위의 조치가 자신들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이라고 분노하여 송저를 참형에 처하도록 명종을 압박하였다. 명종이 무신들을 설득하여 송저를 거제 현령으로 좌천시켜 사건이 일단락되었지만, 이 사건 이후 폐단을 고치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고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송저는 이후 간의대부가 되어 중앙 정계에 들어갔으나, 또다시 무신들과의 알력에 희생되어 원도(遠島)로 유배되었다. 당시 천문상으로 무신들에게 액(厄)이 있을 것이라는 술사(術士)의 말이 있자, 무신들이 이 재액을 문신들에게 옮기려 송저 등을 무고하여 유배하도록 명종에게 강권하였던 것이다. 명종송저에게 죄가 없음을 알고 다시 불러 기용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결정되지 못하여 여의치 않았다. 1187년(명종 17) 판예빈성사로 치사하고 몇 년 뒤 67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