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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27
한자 李時白
이칭/별칭 돈시(敦詩),조암(釣巖),연양군(延陽君),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충익(忠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1년연표보기 - 이시백 생
몰년 시기/일시 1660년연표보기 - 이시백 졸
추모 시기/일시 1674년 - 이시백 충익(忠翼) 시호 받음
부임|활동지 이시백 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유배|이배지 이시백 유배지 - 전라북도 익산시
묘소|단소 이시백 묘소 -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연안(延安)
대표 관직 양주 목사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아버지는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이다. 이시방(李時昉)의 형이다.

[활동 사항]

이시백(李時白)[1581~1660]은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유생의 신분으로 아버지 이귀를 따라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 다음 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가 되어 반란군을 진압한 공으로 수원 방어사가 되어 서울을 잘 수호하였다. 1629년(인조 7) 삼수미(三手米)를 거두는 일에 잘못을 범하여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이내 판결사가 되었다가 1630년(인조 8) 양주 목사를 거쳐 강화 유수가 되었다.

양주 목사로 재직한 기간은 너무 짧아서 관련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시백이 양주 목사로 부임하기 전 동쪽 교외에 송별연 자리가 있어서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활쏘기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초대받았던 이식(李植)이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갑옷을 입고 활로 무장하고 오랑캐를 쳐부수러 요하에 가는 것이 아니라 겨우 양주에 목사로 부임한다.”는 내용의 해학적인 시를 써 준 것이 이식의 문집인 『택당집(澤堂集)』 4권에 「이돈시시백출목양주, 개조동교음사, 여병불부, 희송일절(李敦詩時白出牧楊州, 開祖東郊飮射, 余病不赴, 戲送一絶)」이란 제목으로 남아 있다.

이시백이 양주 목사로 있을 때 인조가 목릉에 배알하고 석물의 공역을 살폈는데, 이때 애쓴 여러 공장(工匠)과 능 수호군들에게 상을 내리고, 아울러 이시백에게도 분주하게 주선한 공로를 인정하여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인조실록(仁祖實錄)』 23권 1630년 11월 11자 기사에 남아 있다.

이시백은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면서 인조를 맞아 보필하였으며, 1638년(인조 16)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심양에 볼모로 서자를 보낸 것이 탄로 나서 여산(礪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풀려나 한성 판윤·형조판서·공조판서, 1646년(인조 24) 다시 병조판서, 1650년(효종 1)에는 우의정, 1653년(효종 4) 좌의정에 이어 1655년(효종 6)에는 영의정에 임명되어 화려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1652년(효종 3)에는 도봉 서원 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도봉 서원 원장직은 경원장제(京院長制)로 시행되고 있어서 서울에 거주하는 유력 인사들에게 맡겨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시백도 이 경우라고 짐작된다. 이시백인조가 친히 불러 세자를 소개하면서 후일을 부탁하였을 만큼 당대의 유력 인사였지만 청빈한 생활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묘소]

묘는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1653년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674년(현종 15) 7월 11일 충익(忠翼)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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