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86
한자 洪啓迪
이칭/별칭 혜백(惠伯),수허재(守虛齋),의간(毅簡),충간(忠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80년연표보기 - 홍계적 생
활동 시기/일시 1708년 - 홍계적 문과에 급제
몰년 시기/일시 1722년연표보기 - 홍계적 졸
추모 시기/일시 1725년 - 홍계적 신원
추모 시기/일시 1779년 - 홍계적 의간(毅簡) 추시
추모 시기/일시 1779년 - 홍계적 이조 판서 추증
추모 시기/일시 1781년 - 홍계적 충간(忠簡) 추시
거주|이주지 홍계적 거주지 - 서울
부임|활동지 홍계적 부임지 - 경기도 양주
유배|이배지 홍계적 유배지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흑산도
신도비 홍계적 신도비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상수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남양
대표 관직 부제학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에 제수된 문신.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혜백(惠伯), 호는 수허재(守虛齋). 증조할아버지는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홍처후(洪處厚)이고, 할아버지는 사헌부 장령을 지낸 홍수하(洪受河)이며, 양부는 증이조참판 홍우석(洪禹錫), 생부는 홍우규(洪禹圭)이다. 어머니는 박세구(朴世耉)의 딸이다.

[활동 사항]

홍계적(洪啓迪)은 문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박세당(朴世堂)의 저술인 『사변록(思辨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려서 이경석(李景奭)의 손자인 이하성(李廈成)의 배척을 받는 등 서인 노론의 학풍과 정치적 정당성을 위해 활동하였다. 1708년(숙종 34) 문과에 급제한 뒤에는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언관으로 활동하였다. 1716년(숙종 42) 교리로 재직 중일 때에는 권상하(權尙夏)의 파직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려 유봉휘(柳鳳輝)로부터 배척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곧 부교리를 거쳐 이조 좌랑으로 제수된 뒤 윤선거(尹宣擧)의 문집 속의 내용이 사림들 사이에도 논란이 많은 것이라서 엄한 처분이 필요하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717년(숙종 43)에는 교리로 재직 중 왕세자 대리청정(代理聽政)의 하교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기록하지 말라는 건의를 하고, 응교로 승차하였으나, 홍계적이 외직에 제수해 주기를 바라자 이해 12월 7일 양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12월 17일에는 양주 목사로 부임하기 위해 숙종에게 하직하였지만, 도사 이진망(李眞望)과 피혐의 단서가 있어서 임무를 수행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파출시킨다는 경기 감사의 장계가 12월 29일자 『승정원일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홍계적이 실제로 양주 목사의 임무를 수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바로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아 파직되었고, 곧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부제학·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부제학으로 재직 시 이정신(李正臣)이 ‘당여(黨與)가 극성스럽고 임금의 형세가 외롭다’라고 발언한 것을 비판하였다가 흑산도에 안치되었고, 1722년(경종 2)에 노론 4대신의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문집인 『수허재 유고(守虛齋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영조가 즉위한 후 1725년(영조 1)에 신원되고 1779년(정조 3) 이조판서에 추증되면서 의간(毅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81년(정조 5) 충간(忠簡)으로 시호가 바뀌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