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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52
한자 徐命膺
이칭/별칭 군수(君受),보만재(保晩齋),문정(文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9-1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혜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16년연표보기 - 서명응 생
활동 시기/일시 1754년 - 서명응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76년 - 서명응 규장각 제학 제수
몰년 시기/일시 1787년연표보기 - 서명응 졸
부임|활동지 서명응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달성
대표 관직 대제학

[정의]

조선 후기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던 이주진 묘표의 글씨를 쓴 문신이자 학자.

[개설]

서명응(徐命膺)[1716~1787]은 정조가 즉위한 후 규장각의 설립과 그 편찬 사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로 평가된다.

[가계]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군수(君受), 호는 보만재(保晩齋). 5대조 할아버지가 판서 서성(徐渻)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서경주(徐景霌)선조의 첫째 옹주인 정신 옹주(貞愼翁主)와 혼인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남원 부사 서정리(徐貞履)이고, 할아버지는 참찬 서문유(徐文裕)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서종옥(徐宗玉)이다. 어머니는 이집(李㙫)의 딸인 덕수 이씨(德水李氏)이다. 영의정이었던 서명선(徐命善)과 형제이다.

[활동 사항]

서명응은 1754년(영조 30) 증광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 수찬, 함경도 어사, 대사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정조가 즉위한 후 규장각의 첫 번째 제학(提學)에 임명되었다.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서적을 널리 섭렵하고 역학(易學)에 능하여 일찍부터 박학 강기(博學强記)한 것으로 명망이 있었다. 임금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 빈객으로서 늘 권대(眷待)를 받았으며, 무릇 경사(經史)에 의의(疑義)가 있으면 임금이 손수 써서 질문하였다고 실록에서 평하고 있다. 동생 서명선과 함께 정조에게 크게 신임 받았다.

[학문과 저술]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는 서명응의 학풍은 오늘날 일명 북학파(北學派)라 일컬어지며, 그의 아들 서호수(徐浩修)와 손자 서유구(徐有榘)가 계승하였다. 또한 수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역서인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황극일원도(皇極一元圖)』·『계몽도설(啓蒙圖說)』 등과 사서인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기사경회력(耆社慶會曆)』·『기자외기(箕子外紀)』·『대구 서씨 세보(大丘徐氏世譜)』·『양한사명(兩漢詞命)』·『고사신서(攷事新書)』 등을 편찬하였다. 아울러 『보만재집(保晩齋集)』·『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보만재잉간(保晩齋剩簡)』 등의 저서를 남겼다. 서명응의 저술은 사후에 서호수서유구가 모아 정리한 것으로, 정조로부터 “우리나라 역사상 없었던 거편(巨編)”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덕수 이씨 묘역에 있던 이주진 묘표(李周鎭墓表)의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이주진서명응의 외삼촌이다. 이주진 묘표는 현재 서울 역사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남귀 여가 혼(男歸女家婚)으로 외가와의 관련이 밀접했는데, 덕수 이씨의 경우 도봉구 방학동 지역에 세거하고 집장지((集葬地)가 있다는 점에서 서명응 역시 도봉구와 밀접한 인물이라 하겠다. 또한 서울과 경기 학자, 특히 서인 계열 학자들이 도봉 서원에서 수학하고 교류했다는 점에서 도봉 서원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보만재’라는 호는 정조가 내려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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