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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62
한자 柳宗
이칭/별칭 류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김우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010년 5월 - 유종 섬으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010년 11월 - 유종 복관
활동 시기/일시 1010년 12월 - 유종 도봉사에서 현종 알현
활동 시기/일시 1011년 1월연표보기 - 유종 은거
부임|활동지 화주관(和州館) - 함경남도 영흥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양성(陽城)
대표 관직 병부 시랑(兵部侍郞)

[정의]

도봉 지역에서 피난길에 오른 국왕을 알현한 고려 전기의 문신.

[활동 사항]

『고려사(高麗史)』 등에 의하면 유종(柳宗)의 활동상이 주로 나타나는 시기는 2차 고려-거란 전쟁기이다. 주목되는 것은 당시 거란의 침입을 유도한 원인으로 유종의 행동이 거론되는 점이다. 즉 과거에 하공진(河拱辰)이 동여진(東女眞)을 치다가 패배했던 일에 유종이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그가 화주 방어 낭중(和州防禦郎中)으로 근무하던 중 여진족 95명이 고려에 내조하기 위해 화주관(和州館)에 오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여진족이 이에 복수하기 위해 거란에 호소하니,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난으로 목종이 폐위된 것을 문책하겠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종은 이 사건에 대한 문책으로 1010년(현종 원년) 5월 하공진(河拱辰)과 함께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거란의 침입이 시작되자 1010년 11월에 유종하공진과 함께 복직되었다. 현종(顯宗)이 거란군을 피해 남행하자 유종하공진도봉사(道峯寺) 행재소(行在所)에서 현종을 알현하였다. 하공진은 “거란이 본시 역적을 정벌한다는 구실로 출병하였는데 이제 이미 강조를 잡았으니 이때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제의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철퇴할 것이라”고 하고는 거란과의 화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사절로 자신을 파견할 것을 주장하였다. 왕의 허락을 받고 하공진은 거란으로 떠났고, 이후 유종장연우(張延祐)·채충순(蔡忠順)·주저(周佇)·김응인(金應仁) 등과 함께 현종의 피난길을 호종하였다. 하공진이 거란의 진영에 포로로 잡혔다는 소문이 돌면서 대부분의 호종 신료들이 도망쳤으나, 유종은 몇몇 신하들과 함께 남아 있었다.

유종현종에게 자신의 적향(籍鄕)인 양성(陽城)으로 피난할 것을 건의하였다. 현종이 그에 따라 양성으로 행차하였는데, 밤중에 유종김응인과 함께 왕명을 사칭하여 왕의 말안장을 부수어 고을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어 유종현종에게 두 왕후를 각기 향리(鄕里)로 돌려보내고 그 호종 장졸들을 전선으로 보내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종 일행이 천안부(天安府)에 이르자 유종은 왕에게 김응인과 함께 석파역(石坡驛)에 미리 가서 영접을 준비하겠다고 하고는 도주하였다.

유종의 도주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왕의 장졸들을 전선으로 보내고자 했던 일 및 예전에 화주관에서 여진족을 죽인 일을 생각할 때 아마도 주전파의 입장에서 왕의 태도가 못마땅하여 왕을 떠났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후 유종이 거란과 싸우다 죽었는지 여부는 더 이상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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