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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73
한자 申翼相
이칭/별칭 숙필(叔弼),성재(醒齋),정간(貞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혜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34년 11월 2일연표보기 - 신익상 생
활동 시기/일시 1660년 - 신익상 진사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97년 11월 3일연표보기 - 신익상 졸
추모 시기/일시 1710년 - 신익상 신도비 건립
출생지 신익상 출생지 -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봉동리
거주|이주지 육오당(六吾堂) - 아산 금곡
거주|이주지 양주 노원촌
거주|이주지 지족암(止足庵) - 남양 신리
거주|이주지 정휴당(靜休堂) - 광주(廣州) 정림촌
거주|이주지 개석당[낙산제] - 서울특별시 종로구·성북구 경계부 낙산
부임|활동지 신익상 부임지 - 이천(伊川)
부임|활동지 신익상 부임지 - 의주(義州)
묘소|단소 신익상 부부 묘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사당|배향지 신익상 신도비 - 경기도 동두천시 상패동 산65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고령(高靈)
대표 관직 이조판서

[정의]

현재의 도봉구 지역을 관할하였던 양주에 은거한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숙필(叔弼), 자호(自號)를 성재(醒齋)라고 하였다. 선조인 신성용(申成用)이 고려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현달한 이후 대대로 고위 관직을 지낸 집안이다. 고조할아버지는 가평 군수(加平郡守)를 지낸 신여주(申汝柱)로서 가묘(家廟)에 불이 나자 신주를 보호하다가 사망하여 이조 좌참판(吏曹左參判)으로 추증되고 정려(旌閭)되었다. 증조할아버지 신벌(申橃)은 동지중추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할아버지인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신응구(申應榘)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만퇴 선생(晩退先生)이라고 불렸다.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 신량(申湸)으로서 호는 호은(湖隱)이다.

신익상(申翼相)의 공으로 인해 증조할아버지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할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으로 각각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된 성주 이씨(星州李氏)로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경(李坰)의 딸이자 판서 충숙공(忠肅公) 이상길(李尙吉)의 손녀이다.

신익상의 처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부사(府使) 박철(朴徹)의 딸로서 정경부인에 봉해지고 신익상보다 두 달 앞서 사망하여 합장되었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으나, 1남 1녀는 어려서 죽었다. 장남 신숙(申潚)은 군수(郡守)로서 좌의정(左議政) 이단하(李端夏)의 딸과 결혼하여 신의집(申義集), 신희집(申喜集)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둘째 아들 신제(申濟)는 부사(府使) 이적길(李迪吉)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첫째 딸은 현감(縣監) 한세기(韓世箕)에게, 둘째 딸은 시직(侍直) 이한종(李漢宗)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신익상은 1634년에 구례(求禮)에서 태어났다. 1660년에 진사(進仕)가 되고 2년 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이후 잇따라 양친의 상을 당하였으며, 1666년 복(服)이 끝나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천거를 받아 사국(史局)에 들어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檢閱兼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이후로 한동안 설서와 봉교(奉敎), 검열(檢閱) 등을 지내면서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부묘(祔廟)를 청하기도 하고 실록 찬수(繤修)에도 참여하는 등 직언을 한 바가 많았다.

1672년에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제수되었다가 곧 군함(軍銜)[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벼슬]으로 체부되었으며, 1673년 봄에 이천 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갔다가 가을에 천거에 의해 홍문관 부교리 지제교(副校理知製敎)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겨울에 재차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674년에 실록 편찬을 마치지 못한 책임으로 해직되어 북도 병마평사(北道兵馬評事)로 나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와 지평(持平)과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고 곧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올랐다. 당시에 당인(黨人)들이 정권을 잡고 사류(士類)들을 대거 귀양보내는 일이 벌어지자 신익상은 1676년에 아산(牙山)의 금곡(金谷)으로 퇴거하여 육오당(六吾堂)을 짓고 시문(詩文)을 지으며 지냈다. 이 해에 이조전랑(吏曹銓郞), 헌납(獻納) 등에 수차례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77년에는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와 인동 부사(仁同府使)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통정(通政)으로 승진시켜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제수하고 부임 여부를 직접 하문하자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하였다. 이후로 평안도 절도사, 도승지, 병조참판, 대사간, 전라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며 치적을 올렸으나 질병에 걸린 이후로는 병조·호조·예조·이조의 참판과 삼사의 장관, 성균관과 승정원의 장에 두루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89년에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발생하여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사제(私第)로 폐한다는 명이 내려지자 당시 군함이었던 신익상은 그 부당함을 간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및 경기도 양주시, 의정부시 등을 포함하는 양주(楊州)로 퇴거하여 음식을 끊고 노원촌(蘆原村)에 은거하였다. 이후 예조 참판에 제수되고 희빈 장씨의 책봉을 명나라에 알리기 위한 부연사(赴燕使)로 차출되자 이를 극구 사양하다가 파직되었다.

1694년에 인현 왕후가 복위되자 신익상은 공조판서로서 경연과 비변사의 여러 소임을 겸하게 되었다. 이어 우참찬과 대사헌으로 옮겨 중전의 교명문(敎命文)을 지었으며,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러던 중 본래 앓고 있던 괴증(塊症)이 점차 심해져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아 부득이 다시 관직에 나아가곤 하다가 1697년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11월 3일 낙산제(駱山第)에서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신익상은 어려서부터 어울려 놀기를 싫어하고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만년에도 평소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문장이 우아하면서도 거침없었으며, 시율(詩律)도 여유가 있고 아름다웠다. 전자(篆字)에 특히 뛰어나서 아버지 신량의 비인 ‘제용정 신량 비(濟用正申湸碑)’와 이경(李絅)의 묘갈인 ‘지중추 이경 갈(知中樞李絅碣)’에 글씨를 남겼다. 문집으로 『성재 유고(醒齋遺稿)』가 남아 있다.

[묘소]

1697년 9월에 신익상의 부인 함양 박씨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 석 달 뒤에 신익상이 뒤이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정월 3일에 동시에 발인하여, 양천(陽川)의 남쪽 천신리(天神里)의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숙종(肅宗)이 교서를 내려 3년분의 녹봉을 하사하고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근시(近侍)를 보내어 제사하게 하였다. 양천 천신리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일대에 해당한다.

[상훈과 추모]

1710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신숙주의 손자인 신용개(申用漑), 신익상의 증조할아버지 신벌, 아버지 신량의 신도비와 함께 경기도 동두천시 상패동의 고령 신씨 신도비군(高靈申氏神道碑群) 내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남양주시의 고령 신씨 종산(宗山)에 있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으며, 1986년에 동두천시 향토 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신익상의 신도비는 아들 신숙의 부탁으로 영의정을 지낸 유상운(柳尙運)이 쓴 행장을 바탕으로 하여 의정부 우의정 윤증(尹拯)이 비명을 짓고, 신익상의 손자인 신의집이 쓰고,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전(篆)을 썼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8.27 [상훈과 추모] 수정 <변경 전> 우의정 윤휴(尹拯) <변경 후> 우의정 윤증(尹拯)
이용자 의견
박** 신익상(申翼相)
취임일: 1696. 6. 27.
퇴임일: 1696. 8. 10.
재임기간:

1634(인조 12)∼1697(숙종 23). 64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숙필(叔弼), 호는 성재(醒齋). 시호는 정간(貞簡). 동지중추부사 벌(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부숭지 응구(應榘)이고, 아버지는 정언 양(湸)이며, 어머니는 이경(李坰)의 딸이다.
1660년(현종 1)에 진사시를 거쳐 1662년 정시문과에 병과 9등으로 급제하였다. 검열·봉교를 거쳐 오랫동안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사실을 곧게 기록하여 명성을 얻었다.
1672년 홍문록에 올랐다. 숙종 즉위 후 남인이 득세하자 충청도 아산에 은거하였다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때 특지(特旨)로 도승지에 오르고 이어 이조참판·전라도관찰사·부제학·대사성을 거쳐 1684년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재임시 주변 읍민을 동원하고 공명첩(空名帖)을 발급하는 방법으로 영변의 철
2015.04.01
조** 위의 내용중 한자의 오류가 있어서 정정 요청합니다. 이양 이아니라, 이자 회자요, 윤휴가 아니라,윤증 입니다.
  • 답변
  •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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