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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708
한자 金東鎬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류정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9년 9월 18일연표보기 - 김동호 생
수학 시기/일시 1937년 - 김동호 일본 오카야마 제6고등학교 입학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김동호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김동호 출생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학교|수학지 제6고등학교 - 일본 오카야마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도봉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동호(金東鎬)[1919~1982]는 1919년 9월 18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401번지[현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태어났다. 1938년 봄 일본 오카야마[岡山] 시에 있는 제6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 동기생 여운창(呂運昌) 등 8인과 함께 친목회를 조직하였다. 처음에는 상호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가 강력히 전개되고 한글 폐지나 창씨개명 등 조선의 민족성을 말살시키려는 정책을 시행하자 민족의식이 뚜렷하였던 김동호는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게 되었다.

1940년 봄 조선인 신입생 4명이 입학하여 조선인 학생이 늘어나자 동기생 여운창이 민족주의를 친목회의 사상으로 삼고 독립운동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김동호와 3학년생 손의석(孫宜錫), 2학년생 고창섭(高昌燮) 등도 이에 찬성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모임의 당면 목표는 오카야마 제6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계몽하고 북돋아 민족주의를 학우회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반 조선인 대중을 지도하고 계몽할 중심 세력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일본의 조선인 민족주의 단체와 조선의 민족주의 단체 등과 긴밀히 연계하고자 하였다. 또한 중일 전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본에 혼란이 일어날 것이니, 이때를 틈타 일제히 봉기하여 조선 독립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매월 한 번씩 3학년생의 하숙집을 돌아가며 회합 장소로 정하여 친목회라는 명칭으로 모여 비밀리에 민족의식의 앙양 내지 구체적 활동 방침에 관하여 협의하였고, 그 외 신입생 환영회 석상이나 각종 회합 자리마다 민족의식을 계몽하여 동지를 모으고 친목회를 확대하려고 노력하였다. 회합에서 의논하고 협의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독립한 국가를 건설하는 길 밖에 다른 방도가 없으며, 한 민족 한 국가는 자연의 법칙이다. 둘째,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선인 학생은 더욱 단결을 굳게 하고 민중을 민족적으로 지도하여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 신입생에 대하여는 총독 정치의 모순, 조선 민족에 대한 차별 대우 등의 현실을 지적하여 민족의식을 지도 계몽한다[1940년 4월 12일 신입생 환영회를 개최하고 이와 같은 계몽을 함].

셋째, 조선 민족은 열등한 민족이 아니다. 이미 올림픽 대회에서 세계 각국 선수를 압도하고 우승한 손기정(孫基禎)은 이 민족의 우수성을 발휘하고 있다. 넷째, 중일 전쟁은 장개석이 미국·영국·소련 등의 강대국으로부터 군사상, 경제상의 원조를 받아 장기적인 항전으로 용감하게 일본군을 반격하고 있다. 일본은 전쟁의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내부 붕괴를 일으켜 마침내 패전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일제히 봉기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일반 대중을 민족적으로 지도 계몽하여야 한다.

다섯째, 조선의 선배는 희생적 정신이나 단결력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일본에게 정복당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점에 비추어 제일 먼저 스스로 단결을 도모함과 동시에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희생적 정신, 단결력을 양성하여야 한다. 여섯째, 일본인과 결혼하면 자연히 민족의식이 거세되는 것이니 조선 민족의 지도자인 자는 일본인과의 결혼을 절대로 피하고 더욱 민족정신을 연마한다.

일곱째, 노몬한(Nomonhan) 사건은 신문에는 일본이 우세하여 승리하였다고 보도하였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문 보도는 믿을 수 없다. 여덟째, 조선의 3·1 운동은 민중의 일시적 무통제(無統制)의 폭동이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에 비추어 스스로 단결을 굳게 하고 대중의 지도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김동호 외 4인은 1941년 2월 17일 경찰에 일제히 검거되어,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 김동호는 미결 기간을 합산하여 1943년 2월까지 3년간 옥고를 치루고 면소(免訴)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독립운동사 자료집』13(독립 유공자 사업 기금 운용 위원회, 1977)
  • 공훈 전자 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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