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1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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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道峯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은순 |
작가 생년 시기/일시 | 1758년 - 『도봉첩』 작가 김석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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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산수화 |
작가 | 김석신 |
재질 | 지본담채 |
조선 후기 선비 이재학과 서용보가 도봉산을 유람하며 시회를 가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화첩.
『도봉첩(道峯帖)』은 선비인 이재학(李在學)[1745~1806], 서용보(徐龍輔)[1757~1824] 등이 도봉산(道峰山)을 유람하며 시회를 가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화첩이다. 이재학은 관료로서 활약하다가 순조 즉위 후 곧 귀양을 가는 등 고초를 겪다가 1806년에 사망하였다. 서용보는 노론 출신의 고위 관료로서 영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 세력가였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면 『도봉첩』은 1800년 이전, 18세기 말 경의 작품일 가능성이 엿보인다. 현재 책은 없어지고 제첩(題帖)에 붙어있던 윗그림인 「도봉도(道峯圖)」만이 전하고 있다. 「도봉도」는 이재학, 서용보의 도봉산 유람에 함께했던 화원 김석신(金碩臣)[1758~?]이 그렸다.
김석신의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군익(君翼), 호는 초원(蕉園)이다. 조선 후기 가장 대표적인 화원 집안의 하나인 개성 김씨 집안 출신으로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1742~1789]의 양자가 되어 화업을 익혔다. 형 역시 유명한 화원인 김득신(金得臣)이다. 김석신은 부사과(副司果)를 지냈고,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으며, 「도봉도」 이외에도 진경 산수화가 여러 점 전해지고 있다.
「도봉도」의 크기는 36㎝×53.7㎝이고, 종이에 담채를 사용하였다. 그림 옆에 붙은 별지에는 화첩의 표제인 ‘도봉첩’이란 글씨가 적혀 있다. 그림 옆의 별지에 적힌 표제 아래에는 “초원 김석신이 경치를 그린 것으로 명류 이재학과 서용보가 도봉산을 산책하고 그리게 한 것이다[蕉園金碩臣之寫景此爲名流李在學徐龍輔等散策於道峰之作也]”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화첩의 제작 동기와 주문자 등을 알 수 있다.
「도봉도」는 웅장한 도봉산과 그 옆에 솟은 북한산(北漢山) 인수봉(仁壽峰)의 험준한 암봉을 배경으로 도봉산 골짜기에 위치한 도봉 서원(道峯書院)을 그렸으며, 서원 앞으로는 시원한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도봉도」의 전체적인 구도는 정선(鄭敾)의 진경 산수화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 T자형의 소나무와 미법으로 표현한 수지법, 빠른 필치와 짙은 먹, 암봉에 구사된 적묵 기법 등이 정선 화풍에 연원을 둔 것이다. 또한 전체적으로 청색과 녹색의 선염을 풍부하게 사용한 점, 원경에 보이는 굵은 필선의 펜촉 모양의 암봉들에는 김석신의 양아버지인 김응환의 영향이 엿보인다. 그러나 김석신은 두 대가들의 화풍을 조합하고, 여기에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와 색감을 더하여 고유의 개성적인 화풍을 창출하였다. 정선에 비해 좀 더 예리하고 산만한 독특한 필치와 맑은 색채 등에서 김석신의 개성이 나타나며, 도봉산과 북한산의 강렬한 산세를 잘 전달하고 있다.
「도봉도」는 화원 김석신이 전통적인 대가들의 화풍을 절충하여 구사한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하여 정선의 영향이 많이 반영된 화풍을 구사하였다. 이를 통해 18세기 후반 이후에도 보수적인 미감을 가진 문인들이 정선풍의 진경 산수화를 애호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