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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에 쓰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721
한자 道峯書院-
이칭/별칭 「제도봉서원」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607년 - 「도봉서원에 쓰다」 저자 송시열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89년 - 「도봉서원에 쓰다」 저자 송시열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787년 - 「도봉서원에 쓰다」가 수록된 『송자대전』 간행
배경 지역 도봉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지도보기
성격 한시
작가 송시열

[정의]

1673년 무렵 송시열도봉 서원을 소재로 지은 칠언 절구의 한시.

[개설]

「도봉서원에 쓰다[題道峯書院]」는 1673년(현종 14) 무렵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도봉서원의 경관과 수학하는 선비들의 모습을 보고 느낀 감회를 적은 한시이다. 「도봉 서원에 쓰다」송시열의 시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典)』 권2에 수록되어 있다. 『송자대전』의 시들은 먼저 시체별(詩體別)로 나눈 후에 동일한 시체의 시들은 대체로 제작 연도의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다. 「도봉서원에 쓰다」의 바로 다음 시가 「갑인원정즉사(甲寅元正卽事)」인데, 갑인년은 곧 1674년이므로 「도봉서원에 쓰다」는 그 직전인 1673년 무렵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송시열의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김장생(金長生)[1548~1631]과 김집(金集)[1574~165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674년 효종 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하자 그 또한 파직, 삭출되어 유배 생활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자 그도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압송 도중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으며, 조선 후기에 걸쳐 서인 세력의 핵심 인물로 추숭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구성]

「도봉서원에 쓰다」는 4구로 구성된 칠언 절구로 기구(起句)와 승구(承句)에서는 도봉서원이 위치한 곳의 경관을 묘사하였고, 전구(轉句)와 결구(結句)에서는 도봉서원에 많은 선비들이 모여 수학하는 모습을 통해 도봉서원이 지니는 의의를 부각시키고 있다.

[내용]

창애삭립동문개(蒼崖削立洞門開)[푸른 절벽 깎아 세운 듯 동구가 열리어]

간수잔원기곡회(澗水潺湲幾曲廻)[시냇물 잔잔히 몇 굽이 돌아왔나]

요순군민당세지(堯舜君民當世志)[요순시대 군민 만들려는 당시의 뜻을]

묘전공유후인래(廟前空有後人來)[사당 앞에 후인들이 와서 기리네]

[특징]

평기식(平起式)으로, 평성(平聲) 회운(灰韻)으로 압운하였으며 기구의 ‘개(開)’, 승구의 ‘회(廻)’, 결구의 ‘래(來)’를 운자로 썼다.

[의의와 평가]

「도봉서원에 쓰다」는 넓게 보면 선경후정(先境後情), 즉 경관을 먼저 제시하고 감정을 뒤에 노래하는 작시 방법으로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봉서원의 대체적인 경관을 먼저 제시한 뒤에 도학(道學)의 산실로서의 도봉서원의 의의를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전형적인 작시 방식을 택하면서도 도학적 관점에서 도봉서원을 노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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