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북한산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773
한자 北漢山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홍기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정 시기/일시 757년연표보기 - 북한산군이 한양군으로 개칭됨
성격 지방 행정 구역

[정의]

삼국 시대부터 757년까지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5 지리지2 한주(漢州) 한양군(漢陽郡)조에는 “한양군은 본래 고구려 북한산군(北漢山郡)[일명 평양(平壤)]이다. 진흥왕이 주(州)로 삼고 군주(軍主)를 두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양주(楊州) 옛터[舊墟]에 있다. 영현(領縣)은 2개로, 황양현(荒壤縣)은 본래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縣)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풍양현(蘴壤縣)이다. 우왕현(遇王縣)은 본래 고구려 개백현(皆伯縣)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행주(幸州)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지리지에는 빠져 있지만 신라본기 진흥왕 18년[557] 기사에는 “신주(新州)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한편 『고려사』 권56 지리지1 양광도(楊廣道)에는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 양주는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일명 남평양성(南平壤城)]인데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빼앗아서 25년[370]에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개로왕(蓋鹵王) 20년[474]에 고구려 자비왕(慈悲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한성(漢城)을 포위하므로 개로왕이 성을 벗어나 달아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살해당하였으며, 이해에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그 후 신라 진흥왕 15년[554]에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이르러 국경을 정하였고 17년[556]에 북한산주를 창설하여 군주를 두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양주도호부(楊州都護府)조는 ‘고구려 자비왕’을 ‘고구려 장수왕’으로 고친 점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 한성부(漢城府)조에서는 백제 시조인 온조왕북한산군을 빼앗아 성을 쌓았다고 한 점에서 차이가 날 뿐 기본적인 내용은 『고려사』와 동일하다.

[내용]

북한산군이 정확히 처음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는 지금의 도봉 일대를 다스렸던 북한산군을 고구려가 설치한 것처럼 기록하였는데, 만일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원정 이후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산군을 비롯한 한강 하류의 6개 군(郡)은 551년[백제 성왕 29, 신라 진흥왕 12] 신라와 백제의 한강 유역 공략 과정에서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2년 뒤인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를 공격해 6군을 모두 차지하면서 도봉 지역을 관할하던 북한산군은 신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북한산군은 이후 군사적 거점인 북한산주가 이곳에 잠깐 설치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큰 변동 없이 통일 신라까지 계속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신라는 한화 정책(漢化政策)의 일환으로 757년(경덕왕 16)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에 이르는 지방 행정 단위의 명칭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쳤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산군한양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 초기 한양군은 양주로 바뀌었다가 1067년(문종 21)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