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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003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승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76년 11월 7일 - 연산군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82년 8월 16일 - 연산군 어머니 사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83년 2월 6일 - 연산군 왕세자 책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88년 2월 6일 - 연산군 혼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94년 12월 24일 - 연산군 즉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98년 - 연산군 무오사화 발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04년 - 연산군 갑자사화 발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06년 9월 2일 -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폐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06년 11월 6일 - 연산군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13년 2월 20일 - 현재의 연산군 묘로 이장

[개설]

연산군(燕山君)성종(成宗)의 장남으로 태어나 1494년 12월 29일 부친을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두 차례의 사화를 포함한 각종 폐정, 그리고 개인의 향락을 추구하면서 정치를 등한시한 결과, 1506년 9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고 그해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있다.

[탄생과 즉위]

연산군[재위 1495~1506년]의 이름은 이융(李㦕)으로 1476년(성종 7) 11월 7일에 성종[재위 1470~1494]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은 폐비(廢妃) 윤씨(尹氏)로 봉상시판사(奉常寺判事) 윤기견(尹起畎)의 딸이다. 폐비 윤씨는 1473년(성종 4) 3월 19일에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1476년(성종 7) 8월 9일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11월 7일에 연산군을 출산하였다. 하지만 연산군이 4살 때인 1479년(성종 10) 6월 2일에 폐서인(廢庶人)되었다가, 1482년(성종 13) 8월 16일에 사사(賜死)되었다.

모친이 폐서인되어 사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자였던 연산군은 8세가 되던 1483년(성종 14) 2월 6일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살이었던 1488년(성종 19) 2월 6일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신승선(愼承善)의 딸을 세자빈(世子嬪)으로 맞아들이며 그 지위를 공고히 했다. 1494년(성종 25) 12월 24일에 성종(成宗)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12월 29일에 창덕궁(昌德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사화(士禍)와 폐정(廢政)]

성종 대에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들인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훈구 대신 세력과 대립 관계를 구성하였다. 연산군 즉위 이후 훈구 대신 세력들의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가 펼쳐지면서 두 차례에 걸친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첫 번째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 과정에서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 삼으며, 1498년(연산군 4) 7월에 일어났다. 이는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端宗)을 항우(項羽)에게 죽은 의제(義帝)에 빗댄 글로, 연산군의 증조할아버지인 세조를 비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이와 연루된 사림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처단하였다. 김종직은 부관참시(剖官斬尸)를 당하였으며,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는 능지처사(陵遲處死), 이목(李穆), 허반(許磐) 등은 참수(斬首)되었다. 죽음을 피한 인사들도 유배 등 중형을 받았다. 두 번째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폐사와 관련하여 일어났다. 1504년(연산군 10) 3월 20일에 폐비 윤씨의 모친인 장흥 부부인(長興府夫人) 신씨(申氏)로부터 모친이 폐사된 사유를 전해들은 연산군이 한 밤 중에 모친의 폐사를 도모하였다고 지목된 성종의 후궁 소의(昭儀) 엄씨와 정씨를 창경궁 뜰에서 손수 때려죽이는 패행을 시작으로, 모친의 폐사와 관련된 인사들을 참혹한 형벌로 죽이는 사단을 일으킨 것이다.

심지어 친할머니인 인수 대비(仁粹大妃)를 들이받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또 세조 대의 공신이었던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심회(沈澮) 등을 폐비 논의에 참여한 12간(奸)으로 몰아 부관참시한 후에 효수하기에 이르렀다. 훈구와 사림 가리지 않고 많은 인사들이 처형당한 사건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사화 이후에도 폐정은 계속되었다.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 벽서가 나붙자 한글 사용을 금지하고 언문청(諺文廳)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또 1504년 8월 15일에 경연(經筵)을 정지하는 것을 시작으로, 12월 4일에는 야대(夜對)와 윤대(輪對) 등도 정지하였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혁파하고, 12월 27일에는 홍문관(弘文館)을 폐지하였으며, 나아가 교육 기관이었던 성균관(成均館)을 폐하여 유흥장으로 삼는 등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인사들을 탄압하였다. 이후 연산군은 정치에 신경 쓰기보다는 개인의 향락을 추구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이후에 팔도로 채홍사(採紅使)를 보내 아름다운 여자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흥청(興淸) 또는 운평(運平)이라 칭하고 향락에 동원하였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장악원(掌樂院)을 원각사(圓覺寺)로 옮기고, 그곳에서 가흥청(假興淸) 200, 운평(運平) 1000, 광희(廣熙) 1000을 상사(常仕)하게 하면서 이들에게 기예를 가르치게 하였는데, 당시 연산군이 향락에 빠져있었던 것을 잘 보여준다. 나아가 기녀 출신 장녹수(張綠水)를 후궁으로 삼는 등 부적절한 행위를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풍류에 빠져 있던 연산군은 정치를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자신의 향락을 위해 경치 좋은 곳에 금표비(禁標碑)를 세우고 민간의 출입을 통제하였는데, 그 범위가 너무 넓어 백성들의 생업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12년 7월 18일 기사에 따르면, 왕이 금표 안길을 따라 두모포(豆毛浦)에 놀이를 가므로 궁녀 1천여 명이 따랐었는데, 왕이 길가에서 간음하였다고 하니, 자신의 유흥을 우선시하고 정사를 소홀히 했다고 할만하다.

[중종반정과 사망]

이와 같은 연산군의 폭정과 방탕이 지속되자, 나라 안이 어지러워졌고 민심은 소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1506년 9월 2일에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이 주동한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연산군은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喬洞)에 안치되었고, 숙용(淑容) 장녹수 등 후궁들은 참형(斬刑)에 처해졌으며, 이복동생인 진성 대군(晉城大君), 곧 중종(中宗)이 왕으로 옹립되었다. 이어 9월 24일에 폐비 신씨는 친정집을 수리하여 옮겨가게 하고 아들 폐세자 이황, 창녕 대군(昌寧大君) 이성(李誠) 등이 사사되었다.

연산군 자신도 반정 두 달 후인 1506년 11월 6일에 3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이에 강화(江華)에 왕자군(王子君)의 예에 따라 장사지냈다가, 1512년(중종 7) 12월 12일에 폐비 신씨의 상언(上言)으로 1513년 2월 20일에 양주(楊州) 해촌(海村), 곧 지금의 서울 연산군 묘(燕山君墓)로 이장하였다. 서울 연산군 묘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위치하며,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슬하에 자녀는 부인인 폐비 신씨 소생으로 6남 1녀가 있었으나 아들 중 네 명은 일찍 죽었다. 또 후궁 소생으로 2남 6녀가 있었다. 중종반정 시 아들 네 명은 모두 사사되었다.

[연산군에 대한 평가]

일반적으로 연산군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두 차례에 걸친 사화와 갖가지 패행들의 원인으로 연산군 개인의 나쁜 성품이 지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연산군일기』의 논찬(論贊)이 큰 영향을 미쳤다. 연산군의 친모 폐사 사건에 의한 정신적 충격, 혹은 편집증과 같은 정신 질환 등을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연산군의 성품이 포학하고 사치와 향락을 즐긴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분명 연산군 대의 폭정은 도를 넘어선 감이 있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지만, 이를 온전히 연산군의 포악한 성격으로 돌리기 힘들다는 의견들도 있다.

즉 두 차례에 걸친 사화는 당시 정계가 가지고 있었던 대립 구도가 중요한 원인이었고, 연산군은 왕권 강화 차원에서 이를 활용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 정국은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강력한 왕권보다는 사대부들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추구하였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왕권과의 대립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사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연산군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언관직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해당 관청과 관직은 사림들이 추구하는 정치 구조에서 핵심적인 역할이어서 이를 견제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아울러 연산군의 향락 추구와 여러 가지 음행들은 반정 이후에 연산군을 폭군으로 몰기 위한 음해였다고 보기도 한다. 흥청과 운평 등을 육성한 것도 개인의 향락이 주목적이라기보다는 왕권의 위엄을 보여 주기 위한 의전용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즉 연산군은 군주 중심의 전제 정치를 추구하였고, 이에 대한 반발로 반정이 일어났으며, 이후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연산군의 치세를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연산군은 풍류를 즐기면서 패도 주의를 지향한 군주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들도 당시 연산군의 행위들이 지나쳤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다. 군주로서의 책무를 다하면서 풍류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등한시하면서 개인의 향락을 추구하여 결국 왕위에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겠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