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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도봉산 서원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018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이현욱

[개설]

서원마을도봉 서원(道峯書院)을 중심으로 과거부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현재의 도봉구 도봉동 일대의 안골, 서원내, 서원말을 하나로 묶은 권역을 의미한다. 2002년 문화 관광부와 전국 문화원 연합회에서 추진한 ‘문화·역사 마을 만들기’ 사업에서 도봉산 서원마을이 서울시에서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하였을 만큼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다.

[도봉 서원에서 유래한 서원마을]

도봉산 서원마을은 조선 시대 도봉 서원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이름도 도봉 서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원마을의 중심을 이루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도봉 서원이다. 도봉 서원은 1573년(선조 6)에 유생들의 발의를 통해 창건되었다. 서원의 창건과 동시에 ‘도봉’이란 이름을 사액(賜額)받았다. 도봉 서원은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 당시에 사사(賜死)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는 곳으로 그를 주향(主享)으로 하여 세워졌는데, 뒤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병향(竝享)하게 되었다. 이후 1723년(경종 3)에 송시열은 출향(黜享)되었다가 1775년(영조 51)에 복향(復享)되었다.

1871년(고종 8)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 당시에 도봉 서원은 훼철(毁撤)되었고, 조광조송시열의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에 유생들에 의해 단이 설치되고 춘추로 제향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다. 1972년에 사우(祠宇)를 복원하였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우는 정면 3간(間)의 건물로 조광조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서원마을의 유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현재 광륜사(光輪寺) 인근에 위치하고, 1748년에 세워진 김명길(金命吉) 묘비에 ‘서원동(書院洞)’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이미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원마을은 대체로 조선 시대의 해등촌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해등촌면은 각종 지리지, 지도 등에 표시되어 있는데, 해촌·해동촌 등의 이칭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 또한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누원(樓院)[다락원]이나 누원점(樓院店) 등도 거의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에 이 지역은 조선 시대에 교통의 요지였고 상업이 발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와 문화의 흔적]

도봉 서원 인근의 암각문(巖刻文)

조선 시대의 도봉 서원은 서울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학맥(學脈)이나 당색(黨色)과 관계없이 모든 유생의 존숭(尊崇)을 받는 조광조를 모신 서원으로 당대의 많은 학자와 관료들이 들렸던 곳이다. 그들이 도봉 서원 인근에 남긴 암각문들이 다수 남아 있다. 대표적인 암각문의 하나로 도봉 서원에 병향되기도 한 송시열이 남긴 암각문이 있다.

암각문은 ‘제월광풍경별전 요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聊將絃誦答潺湲)’이다. 제월광풍(霽月光風)은 비가 그친 뒤의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란 뜻으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인품을 기린 것이고, 다른 구절은 주희(朱熹)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송시열은 또 다른 암각문도 남겼는데, ‘도봉동문(道峯洞門)’이라고 쓴 것이다. ‘도봉동문’이란 도봉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의미로, 본격적으로 도봉산의 선경이 시작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1641~1721]가 쓴 ‘무우대(舞雩臺)’도 남아 있다. 이는 『논어(論語)』「선진」의 ‘욕호기 풍호무우(浴乎沂風乎舞雩)[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다]’에서 따온 것이다. 권상하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는데, 송시열의 수제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권상하의 글씨 위에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쓴 ‘염락정파 수사진원(濂洛正派洙泗眞源)’이 새겨져 있다. ‘염락’은 염계 주돈이와 낙양 출신의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를 지칭하는 것이고, ‘수사(洙泗)’는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송준길이 쓴 내용은 조광조가 성리학의 도통을 잇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 쓴 ‘고산앙지(高山仰止)’도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 뜻은 숭고한 덕행을 몹시 우러러 본다는 것으로, 『시경(詩經)』「소아(小雅)」에 나오는 구절이다. 김수항송시열, 송준길과 가깝게 교유하던 인물로 당시 서인의 핵심적인 인물로 평가받으며, 조선 후기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이다. 도봉 서원 앞 계곡에는 한천(寒泉) 이재(李縡)[1680~1746]가 쓴 ‘광풍제월(光風霽月)’이 남아 있다. ‘광풍제월’은 제월광풍과 같은 의미로 주돈이의 인품을 존경하여 표현한 구절이나, 또한 세상이 잘 다스려진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재영조의 탕평책에 비판적이었던 준론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윤봉구 등과 함께 당시 정국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송시열송준길의 글씨는 1713년(숙종 39)의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1~1767]가 진본을 구하여 다시 각자(刻字)한 것이다. 이상의 암각문 외에도 다수의 암각문이 전하는데, 필자를 알 수는 없다. 현전하는 암각문으로는 ‘복호통천(伏虎洞天)’, ‘연단굴(練丹窟)’, ‘제일통천(第一洞天)’, ‘동중즉선경 동구시도원(洞中卽仙境洞口是桃源)’, ‘연하농처동문개 지향운산물외벽(煙霞籠處洞門開地向雲山物外闢)/만장봉고단굴심 화옹간비자천석 정축구월 도봉□□(萬丈峯高丹窟深 化翁慳秘玆泉石 丁丑九月 道峯□□)’, ‘만석대(萬石臺)’, ‘문사동(問師洞)’ 등이 남아있다.

2. 신정 왕후(神貞王后) 별장 터

서원마을도봉산 자락에 있어 경치가 좋다. 이에 서원마을에는 신정 왕후의 별장이 있기도 하였다. 신정 왕후[1808~1890]는 익종(翼宗)의 비(妃)로서 조선 후기 고종의 즉위와 흥선 대원군의 집권을 도운, 조 대비(趙大妃)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신정 왕후헌종(憲宗)의 모후로서 효명 세자의 빈이었으나 효명 세자익종으로 추존되면서 대비가 되었다. 친정인 풍양 조씨흥선 대원군을 지원하여 안동 김씨를 견제하였다.

신정 왕후의 별장은 현재 남아 있지는 않으며, 광륜사가 그 자리에 들어서 있다. 흔히 99칸 집이라 한데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별장은 6·25 전쟁 당시에 미군의 숙소로 이용되었고, 1980년 훼손 이전에는 영화 촬영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별장이 매각된 후에 헐렸고, 그 터에 금득사라는 사찰이 세워졌다. 2000년경 광륜사가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륜사의 담장 일부가 별장의 담장이었다고 하는데, 그 상태로 보아 최근에 새롭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3.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서원마을의 동제

역사가 오래된 만큼, 서원마을에도 과거에 도당굿과 안골 마을 대감제[거릿대감제]라는 마을 제사가 있었다. 서원마을 도당굿은 현재는 중단되었으나 과거에는 격년으로 2월 초순에 지냈고, 도당굿을 지내지 않는 해에는 산제(山祭)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도 도봉산 광륜사 뒤편에 도당굿 터와 제단 및 도당 바위가 남아 있다. 도당굿이 성할 때에는 인근에서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도당굿의 대상이 되는 신격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도당굿을 주관하는 조직을 ‘대동’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도당굿이 중단되면서 대동에 재산을 기부한 김명길과 김정규를 제사 지내는 정도의 일만을 담당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에 당집이 훼손되면서 당굿의 전승이 끊겼다고도 하고, 1980년대 초에 사라졌다고도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안골에서는 또한 도당굿과 별도로, 음력 정월 20일에 서원마을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제사를 지냈다. 이를 안골 마을 대감제[거릿대감제]라고도 부른다. 관련한 문헌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기원이나 제사의 대상, 내용 등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주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하였을 때, 19세기 중후반 이후 설행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1952년의 축문(祝文)으로 보아 치제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마을에 무사 안녕과 풍년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던 것 같다. 과거에는 제관과 축관을 따로 정했었지만 2012년 현재는 동네의 나이 드신 분이 축문을 읽고, 헌주하고, 대동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끝난다. 안골 마을 대감제는 마을 노인회의 대동 기금으로 운영된다.

[현재에 재현되는 과거]

이처럼 서원마을은 역사와 문화,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마을이다. 2002년 문화 관광부와 전국 문화원 연합회에서 ‘문화·역사 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도봉산 서원마을이 선정되었다. 이 결과 도봉산 서원마을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2004년 『도봉산 서원마을 조사 보고서』로 발간되기도 하였다. 서원마을의 역사와 문화는 현재에도 다음과 같이 재현되고 있다.

1. 도봉 서원 전통 향사(享祀) 재현 및 체험

서원마을에서는 현재도 도봉 서원 전통 향제가 진행되고 있다. 조선 시대 서원이 가지는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선현(先賢)에 대한 향사이다. 향사를 통해 선현의 덕행과 학업을 본받고 후학들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다. 서원마을의 중심이라 할 도봉 서원 역시 이러한 목적에서 창건된 것으로, 그 본래의 취지를 현대에 재현하자는 것이 이 계획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도봉 서원 향사는 춘추로 거행되고 있으며, 『도봉 서원 홀기』를 기준으로 순서를 정하고 설행되고 있다.

헌관(獻官)을 비롯한 제례 참여자들이 선정되며, 경기도 양주 및 포천 등지를 포함한 전국의 유림들이 참여한다. 향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최근에는 2012년 10월에 추향(秋享)을 거행하였다. 또한 전통문화 재현 및 체험의 차원에서 관내 초등학생 및 일반인들의 향사 체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과정은 위의 제례 위원들의 지도 아래 이루어짐으로써 도봉구 지역의 전통문화 행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돕고 있다.

2. 서원마을 축제

도봉산 서원마을 축제 서원마을이 역사 문화 마을로 선정되어 보고서를 발행한 2004년에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전통 향사 재현 및 체현 행사와 함께 진행되며, 크게 세 개의 행사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도봉산 서원마을 안녕 길놀이 행사로서 양주 별산대 놀이 등의 마을 주민과 일반인이 참여하는 마을굿이다. 둘째는 전통 국악 공연으로 사물놀이, 민요 등의 내용으로 도봉 서원 입구에서 진행되었다. 셋째는 서예 대회로 도봉 서원 주변에 산재한 암각문 등을 중심으로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을 소재로 하여 진행되었다.

이후에 서원마을 축제는 열리지 않다가 2008년 10월 11일에 다시 개최되었다. 이는 도봉 서원 종합 사회 복지관과 서원 아파트 주민들로 구성된 서원마을 운동 본부가 주최하였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주민 조직 활동에 대한 주민의 관심을 증대시키고, 지역 행사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를 위한 축제였다. 500인분 대형 전주비빔밥 먹거리 나눔 및 주민 참여 장기 자랑 등을 시행하였다.

이 외에도 도봉 문화원에서는 학생들이 도봉 서원에서 조선 시대의 교육을 체험해 볼 수 있고 서원마을의 문화 유적지를 답사하며 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그 외에도 전통 놀이, 예절 교육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여 종합적인 역사와 문화 체험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서원마을의 역사와 전통은 현재에도 계속 계승·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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