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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306
한자 壬辰倭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 임진왜란 발발
전개 시기/일시 1593년 1월 - 명군과 조선 관군, 의병의 활약으로 평양성 수복
전개 시기/일시 1597년 - 정유재란 발발
종결 시기/일시 1598년 - 임진왜란 종결
발생|시작 장소 임진왜란으로 도봉 서원 전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종결 장소 임진왜란으로 도봉 서원 전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성격 전쟁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서울특별시 도봉구를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역사적 배경]

16세기 동아시아는 명나라의 쇠퇴, 여진족의 발흥, 일본의 통일 정권 수립 등 제반 정세 변화 속에서 크게 동요하였다. 조선은 이 과정에서 야기된 임진왜란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통일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아직 각 세력 간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상태였고, 대외 교역 상 문제를 군사적인 대외 침략을 통하여 해소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15세기에 성립된 병농 일치제(兵農一致制)가 사실상 붕괴되고 1541년(중종 36)부터 군포제(軍布制)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는 조선 초의 오위제(五衛制)를 근간으로 하는 현역 복무 의무 병제에 대치할 만한 용병제와 같은 새로운 군사 제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방에 소홀하기 쉬었다. 이에 율곡 이이는 소위 ‘십만 양병설(十萬良兵說)’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 직전 조선 사회의 군사 제도 상 공백을 틈타 일본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조선을 공격하였다.

[경과]

일본군은 부산의 동래성을 함락시킨 후 북상하여 20일 만에 한성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한양 점령 이후 계속 북으로 공격하는 가운데 부원수 신각(申恪)은 유도 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함경남도 병사(兵使) 이혼(李渾), 그리고 인천 부사 이시언과 합동으로 대오를 편성하여 북상 중인 일본군을 양주의 해유령[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에서 맞서 싸웠다.

신각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은 당시 한성 근교 및 양주 일대에서 약탈 행위가 빈번하다는 정보를 수집하고, 해유령 부근에 잠복하고 있다가 그들의 퇴로를 끊고 공격하였다. 이 전투는 그동안 위축되었던 조선군의 사기를 올리고 왜군에 대한 적개심을 높였을 뿐 아니라 주위의 백성들에게도 큰 용기를 주었다. 일본군은 평양과 함경도 회령까지 진격했으나, 그들이 실제로 점령한 지역은 중요 도시와 일부 군사적 요충지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관군의 공백을 메우며 활발히 항전한 것은 의병(義兵)이었다. 의병 부대는 유학자(儒學者), 전직 관료, 승려 등의 지도 아래 농민군이 중심이 되어 주로 적의 거점들 사이의 연락과 식량 보급을 끊으면서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유격 전술을 썼다. 양주의 경우 의병 부대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양주 목사 고언백(高彦伯)의 경우 경기도 방어사로서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활약하였으며, 이때 한양·양주의 백성들이 적의 정보를 탐지하여 알려주는 등 적극 협조하고 있었던 사실에서 당시 양주민의 왜군에 대한 항전 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침략이 진행되자 명나라에서 조선에 출병하였는데, 이는 조선 정부의 원군(援軍) 요청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전쟁이 자국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였다. 1593년 1월 명군과 조선 관군, 의병의 활약으로 평양성이 수복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는 한성 수복을 위한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후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다시 군량미 보급의 부진을 핑계 삼아 평양으로 물러났다.

조선이 행주대첩과 이순신, 의병 등의 활약으로 점차 전세(戰勢)를 회복하자 일본군은 화의(和議)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화의 교섭은 결렬되었고, 1597년 일본은 다시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때 조선은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설치하는 등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하여, 1598년 일본은 퇴각하였다.

[결과]

임진왜란 으로 조선은 큰 피해와 고통을 당했다.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도 도봉 서원이 소실되었다. 도봉 서원은 1573년 창건되었는데 창건 당시 북쪽에 사우(祠宇)가 있고, 사우 양편에 재학생이 기숙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었다. 남쪽 중앙에는 강당을 건설하였고, 강당 양쪽에 협실(夾室)을 붙여서 지었다. 전면의 행랑채는 시냇가에 위치하였으며, 그 행랑채 옆에 정문을 설치하였다. 이 모든 건물이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어 이후 16년간 폐교되었다가, 1608년(선조 41)에 사우와 서원을 다시 세웠는데, 이후 서원의 모습은 조선 전기와는 크게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은 동아시아 3국에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 명나라는 이 전쟁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족의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였고,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섰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조선의 경우 왕조의 교체는 없었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당한 피해와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다. 전란의 와중에 국토가 황폐해지고 숱한 인명이 살상되었으며, 기근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이를 복구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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