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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목사 해유문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429
한자 楊州牧使解由文書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770년 7월 17일연표보기 - 양주목사 해유문서 작성
발급 시기/일시 1770년 9월 - 양주목사 해유문서 발급
수급 시기/일시 1770년 9월 - 양주목사 해유문서 수급
소장처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6-1
성격 고문서
관련 인물 김화택(金和澤)|윤면동(尹冕東)|이중호(李重祜)
용도 공문서
발급자 윤면동(尹冕東)
수급자 이중호(李重祜)

[정의]

1770년 현 도봉구 지역을 다스렸던 양주목사 윤면동이 작성한 해유문서.

[개설]

조선 시대에는 관원이 교체되었을 때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에 그 소관 업무를 인수인계한 후 이를 상급 기관에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이 절차를 해유(解由)라 한다. 지방 수령의 경우, 관할 구역 내의 관아·서원 및 향교에 이르기까지 각종 건물 및 물품에 대하여 인수받았을 당시로부터 현재까지의 내역을 기록하여 인수인계하도록 하였다.

먼저 전임 수령이 해유를 위해 후임 수령에게 보낼 해유 이관식(解由移關式)을 작성하며, 후임 수령은 이를 살펴보고 이상이 없을 경우 해당 도의 관찰사(觀察使)나 겸순찰사(兼巡察使)에게 해유 첩정식(解由牒呈式)을 보내도록 하였다. 관찰사는 이를 검토한 후 이상이 없다면 해유 첩정을 첨부해 호조 또는 병조에 해유 이관을 보내며, 호조·병조는 이를 검토한 후 이상이 없을 경우 해유를 발급, 해유 사실을 이조에 통보하였다.

[제작 발급 경위]

양주목사 해유문서는 1770년(영조 46) 7월 16일 양주목사에 임명된 윤면동(尹冕東)이 전임 목사 김화택(金和澤)으로부터 인수인계 받은 사항을 1770년 9월 경기 감사 이중호(李重祜)에게 보고한 문서이다. 양주목사 해유문서는 후임 목사 윤면동이 경기 감사 겸 순찰사 이중호에게 보낸 해유 첩정에 해당한다.

[구성/내용]

먼저 해유의 기본적인 사항을 간략히 서술하였다. 전임 목사 김화택은 1769년 12월 18일에 양주목사에 제수되어 1770년 1월 6일에 부임하였으며, 1770년 7월 17일에 체직(遞職)되었다. 김화택은 자신이 부임한 280여 일간 소관 물건의 변동 사항을 기록하여 윤면동에게 넘겼으며, 윤면동이 이를 검토한 후 첩정(牒呈)을 작성한다는 내용이다. 이어 양주목 관할의 쌀[米]과 콩[太]을 사용한 내역을 기록한 일종의 회계 장부를 수록하였다. 18세기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양주는 면포로 납부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본 양주목사 해유문서에서 쌀과 콩의 내역만을 다루고 있는 이유에 참고가 된다. 지출된 항목을 정리하면, 관할 구역 내 능묘 및 서원의 제물 마련을 위해 사용한 것, 관리들에게 지급한 녹봉, 양주목을 지나는 각 지방 관리들을 위해 사용한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본 양주목사 해유문서의 수급 및 발급과 관련된 사항을 정리하였다. 수급자는 경기 감사 겸 순찰사이며, 발급자는 신임 목사 윤면동이다. 경기 감사의 성명은 나와 있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의 연대기 사료로 확인해 볼 때 문서가 발급된 1770년 9월 당시 경기 감사는 이중호였다.

[의의와 평가]

양주목은 선왕들의 능묘들이 다수 존재하였고 도봉 서원과 석실 서원 등 사림의 상징적 서원이 소재하여 유교 왕정에서 상징성을 가진 중요한 곳이었으며, 북방 및 관동 지방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로 기능하였다. 양주목사 해유문서는 이러한 양주목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지방관의 인수인계 과정을 세밀하게 확인할 수 있고, 조선 시대 고문서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어 정치사 연구에도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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