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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와 고문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415
한자 古書-古文書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집필자 홍기승

[정의]

도봉 지역과 관련되어 제작된 각종 문헌 자료.

[개설]

고서(古書)와 고문서(古文書)는 연구자에 따라 정의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고서는 옛 사람이 만든 서책(書冊) 형태의 자료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문서 발급자와 수신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주고받는 글로 정의할 수 있다. 도봉 지역과 관련된 고서와 고문서 가운데 관청에서 제작하거나 관청으로 발송한 공문서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1910년 국권 강탈 이전의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된 것이 많다.

[종류와 내용]

도봉 지역의 고서와 고문서는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 유형별, 시대별로 묶어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정치·행정·사법

조선 시대 관원이 교체될 때 이임자와 후임자가 주고받던 문서인 해유(解由) 문서는 1건이 남아 있다. 「양주 목사 해유 문서(楊州牧使解由文書)」는 1770년(영조 46) 7월 16일 양주 목사에 임명된 윤면동(尹冕東)이 전임 목사 김화택(金和澤)으로부터 인수인계 받은 사항을 같은 해 9월 경기 감사 이중호(李重祜)에게 보고한 문서이다.

「경기도 내거안(京畿道來去案)」은 양주 군수 홍태윤(洪泰潤)이 1904년 2월 22일 외부대신(外部大臣)에게 보낸 것으로 일본군과 군마의 이동 경과를 보고한 문서이다.

「공문편안(公文編案)」은 1894년부터 1901년 사이에 중앙 재정 관할 기관인 탁지부(度支部)와 각 지방 사이에 오고간 공문서를 편철한 것이다. 여기에는 1896년 2월 22일 도봉 서원의 추수와 관련한 문서가 수록되어 있다.

소지류(所志類)는 19세기 말에 작성된 「오필순 소지(吳弼淳所志)」[1884년]와 「오치묵 소지(吳致黙所志)」[1895년] 2건이 있다. 소지는 사서(士庶), 서리(胥吏), 천민(賤民)이 관부에 올리는 소장(訴狀), 청원서, 진정서를 일컫는 용어로, 소송, 청원, 진정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는 문서이다.

『양주군 해등촌면 영국리 피타 치사 여인 구 소사 옥사 죄인 성명 수도 성책(楊州郡 海等村面 靈菊里 被打致死女人 具召史 獄事 罪人 姓名 囚徒 成冊)』은 1898년 1월 발생한 김복이(金福伊)의 구 소사(具召史) 살해 사건에 대한 검시(檢屍) 보고서이다. 양주 군수 임원호(任原鎬)가 초검(初檢)을 하고 포천 군수(抱川郡守) 윤필영(尹弼榮)이 복검(覆檢)을 했다.

지금은 독립된 형태로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전문(全文)이 실려 있는 「송목 금벌 사목(松木禁伐事目)」이 있다. 1469년(예종 1) 도봉산을 비롯한 도성 내외의 산에서 소나무 도벌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 사회

호구 장적(戶口帳籍)에 근거하여 조선 시대 관청에서 발급해 주던 준호구(準戶口)는 1852년(철종 3) 작성된 「안만길 준호구(安萬吉準戶口)」와 1858년(철종 9) 작성된 「성빈 수묘군 안만길 준호구(成嬪守墓軍安萬吉準戶口)」, 1861년(철종 12) 작성된 「안장손 준호구(安長孫準戶口)」 3건이 있다. 모두 양주목(楊州牧)에서 발급한 것으로 지금의 도봉구 방학동 일대에 해당되는 내남면(內南面) 해등촌(海等村) 도당리(道堂里)에 거주했던 안만길안장손의 가계를 잘 보여 준다.

당시 장례 풍속을 잘 보여 주는 장택지(葬擇紙)도 전해지고 있다. 장택지란 장례를 치르거나 묘를 이장할 때 묘지의 위치와 함께 택일한 날짜·시간 등을 적은 문서로, 1941년 1월에 진행된 이기혁(李起赫)의 장례(葬禮) 절차에 대해 기록한 「이정배 소장 장택지(葬擇紙)」가 남아 있다.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서원 마을 전주 이씨 종가의 이정배가 소장하고 있다.

3. 경제

토지와 관련된 문서로는 우선 추수기(秋收記)를 들 수 있다. 도봉구와 관련되어 전해지는 추수기는 모두 일제 시대 제작된 것으로, 가을철 추수할 때 참여한 작인(作人)의 이름, 땅의 면적, 곡식의 종류 및 수량 등이 기록되어 있다. 『노해면 추수기(蘆海面秋收記)』[1914년], 『양주 노해면 마산리 추수책(楊州蘆海面馬山里秋收冊)』[1915년], 『양주 노해면 두산리 추수기(楊州蘆海面斗山里秋收記)』[1916년], 『양주 노해면 추수기(楊州蘆海面秋收記)』[1915~1916년], 『양주군 노해면 상계리 반곡 추수기(楊州郡蘆海面上溪里盤谷秋收記)』[1921년] 총 5건으로 모두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양주 노원 복재 연령군방 전답 타량 성책(楊州 蘆原 伏在 延齡君房田畓 打量成冊)』[1734년]은 조선 숙종의 여섯 째 아들인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1699~1719]이 소유했던 궁방전(宮房田) 양안(量案)이다. 이 양안은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작성 책임자였다.

「내부 고시(內部告示) 제28호」 는 1910년 4월 6일 내무대신 박제순(朴齊純) 명의로 경원선과 호남선 철로로 수용할 철도 용지의 위치를 고시하고 땅과 지상 물건(地上物件)에 대한 신조(新造) 등을 금지하도록 명령한 공문서이다. 대상 지역 가운데는 지금의 도봉 지역에 해당되는 양주 해등촌면이 포함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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