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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31
한자 李廷龜
이칭/별칭 성징(聖徵),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치암(癡庵),추애(秋崖),습정(習靜),문충(文忠)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민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4년연표보기 - 이정구 생
몰년 시기/일시 1635년연표보기 - 이정구 졸
출생지 이정구 출생지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이정구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지도보기
묘소|단소 이정구 묘소 -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연안(延安)
대표 관직 좌의정

[정의]

조선 전기 도봉 서원에서 수학하고 도봉산을 유람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치암(癡庵)·추애(秋崖)·습정(習靜). 아버지는 현령을 지낸 이계(李啓)이고, 어머니는 현감을 지낸 김표(金彪)의 딸인 광주 김씨(光州金氏)이다.

[활동 사항]

이정구(李廷龜)[1564~1635]는 19세가 되던 1582년(선조 15) 정엽(鄭曄)과 함께 도봉 서원에서 독서하고, 이듬해 도봉산과 수락산을 유람하였다. 당시 도봉 서원은 전국 사림의 내방처(來訪處)이자 서울 양반 자제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독서하는 곳이었다. 이에 이정구 역시 젊은 나이에 도봉 서원에 들러 공부하였던 것이다. 22세 되던 1585년(선조 18)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주서(假注書)로 입참(入參)하였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 사신 송응창(宋應昌)에게 나아가 『대학(大學)』을 강론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중국 문인들의 요청으로 『조천 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정구는 여러 차례 중국을 다녀오고, 여러 번 접반사(接伴使)를 지냈기 때문에 중국의 학사(學士)들과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시문을 보여 주고 서문(序文)을 받는 등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또한 문장을 인정받고 왕의 신임을 얻어 병조판서와 예조판서, 우의정·좌의정 등 조정의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였다.

한편, 도봉 서원은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1535~1625]의 회퇴변척(晦退辨斥)[이황(李滉)이언적(李彦迪)의 문묘 종사 반대] 상소로 본격화된 대북 세력의 학통 강화 시도를 공박하는 서인과 남인 세력의 중심지였다. 이정구 역시 도봉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남인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도봉 서원선조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기문(記文)을 찬하고 도성의 인근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집권 서인계의 대표적 서원으로 부상하였는데, 이정구 역시 도봉 서원 기문인 「유도봉 서원기(遊道峰書院記)」를 지으면서 도봉 서원과의 깊은 인연을 자취로 남겼다.

[학문과 저술]

문장으로 유명해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 사대가(漢文四大家)로 일컬어진다.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간행한 시문집 『월사집(月沙集)』이 전한다.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에 장사지냈다가 1639년(인조 17)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635년(인조 13) 문충(文忠) 시호를 받았으며, 1656년(효종 7) 김상헌이 찬술한 신도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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