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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74
한자 李益壽
이칭/별칭 구이(久而),백묵당(白默堂),문간(文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53년연표보기 - 이익수 생
활동 시기/일시 1682년 - 이익수 증광시 병과 2위
활동 시기/일시 1701년연표보기 - 이익수 양주 목사 제수
몰년 시기/일시 1708년연표보기 - 이익수 졸
부임|활동지 이익수 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전주(全州)
대표 관직 양주 목사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구이(久而), 호는 백묵당(白默堂).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10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이괄(李适)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 당시 세 차례나 인조를 호종(扈從)한 이목(李楘)이고, 할아버지는 부제학을 지낸 이지항(李之恒)이다. 아버지는 목사 이원구(李元龜)로, 4남 2녀 중 둘째 아들이다.

[활동 사항]

이익수(李益壽)[1653~1708]는 1682년(숙종 8) 증광시에 병과 2위로 급제하였다. 이어 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87년(숙종 13) 윤선거(尹宣擧)의 강화도 행적에 관한 논란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하여 유배를 간 나양좌(羅良佐)를 변호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이듬해 정언으로 임명되어 복귀, 이어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의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688년(숙종 14)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당시 장소의(張昭儀)[희빈 장씨]가 왕자를 낳자 장소의의 어머니가 산모를 돌보기 위해 옥교(屋轎)를 타고 궁궐에 드나든 일이 있었다. 이익수가 사헌부의 금리(禁吏)를 보내어 그 종을 잡아다가 죄를 다스리고 이를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이에 숙종이 노하여 사헌부의 금리와 조예(皀隸)를 잡아다가 심하게 문초하여 죽기에 이르렀으며, 이익수도 파직되었으나 곧 복귀하였다.

1697년(숙종 23) 승지로 임명되고, 1701년(숙종 27)에는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어 5월에 예조참판에 임명되어 10월에 사사된 희빈 장씨상례 절차 진행에 참여하였다. 그 해 12월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2월 말 다시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양주 목사로 있었던 기간은 3개월 정도뿐이다. 양주 목사 재임 시 참판으로서 담당하였던 희빈 장씨의 장례와 관련하여 숙종으로부터 상을 받기도 하였으나, 양주 목사로서의 행적에 관하여는 전해지는 기록이 없다. 대사간·판의금부사·이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56세로 사망하였는데, 소론의 일원으로 활동하여 노론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였으나, 그런 노론마저도 이익수를 두고 “간약(簡約)하였다는 평가는 일컬을 만하다.”고 할 정도로 명망이 있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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