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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75
한자 李廷馨
이칭/별칭 덕훈(德薰),지퇴당(知退堂),동각(東閣)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9년연표보기 - 이정형 생
활동 시기/일시 1568년 - 이정형 증광시 갑과 2위로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07년연표보기 - 이정형 졸
출생지 이정형 출생지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이정형 은거지 - 경기도 동두천시 동두천동
부임|활동지 이정형 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묘소|단소 이정형 묘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사당|배향지 문암 서원 - 강원도 춘천시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경주(慶州)
대표 관직 양주 목사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동각(東閣). 아버지는 사직서령(社稷署令)을 지낸 이탕(李宕)이며, 지중추부사 이정암(李廷馣)의 아우이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활동 사항]

이정형(李廷馨)[1549~1607]은 1568년(명종 23) 증광시 갑과 2위로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과 헌납 등을 거쳐 1576년(선조 9) 개성 경력(開城經歷)이 되었는데, 직무에 힘쓰고 백성들을 깨우쳐 당시 개성 유수였던 심의겸(沈義謙)이 아끼며 “나이는 적으나 문학지사(文學之士)”라고 칭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피난가자 우승지로서 호종(扈從)하였다. 당시 개성 유수 홍인서(洪仁恕)가 병으로 정사를 돌보지 못하자 그를 대신하여 개성 유수에 임명된 후 형 이정암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였으며, 개성이 함락되자 황해도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여 큰 공을 세웠다.

1594년(선조 27) 고급사(告急使)로 요동(遼東)에 다녀왔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 강원도 관찰사·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나, 북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이 쫓겨나자 양주 송산 두천리(杜川里)[현 경기도 동두천시]로 퇴거하여 중앙 정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1604년(선조 37)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으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여 이듬해 관직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1606년(선조 39) 삼척 부사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젊어서부터 청현(淸顯)의 직을 역임하며 조행(操行)이 있었으나 만년에 이르러 잇따라 큰 고을을 맡으면서 염치없다는 비웃음을 면치 못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이는 양주목이 큰 고을로서 많은 이권이 개입된 곳이었음을 시사한다.

[학문과 저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인 정윤희(丁胤禧)에게서 수학하여 남인 계열의 학통을 이었다. 퇴계의 학문을 존숭하는 의미로 자신의 호를 지퇴당이라 짓기도 하였다. 성리학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성력(星曆)·복서(卜筮)·술수(術數) 등 다방면에 능통하였다. 이원익·이수광(李睟光)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저서로 『지퇴당집(知退堂集)』·『동각잡기(東閣雜記)』·『황토기사(黃兎記事)』·『용사기사(龍蛇記事)』·『수춘잡기(壽春雜記)』 등이 있다.

[묘소]

행장(行狀)에 따르면 본래 양주(楊州) 서산(西山)에 장사 지냈다고 하나 현재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에 있다. 이는 파주 지역이 이정형의 처향(妻鄕)이기 때문에 묘의 관리를 위해 이장한 것으로 보인다. 부인 파평 윤씨의 묘와 조금 떨어진 곳에 각묘로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617년(광해군 9) 생원 이세(李稅) 등이 소를 올려 춘천 문암 서원(文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이정형의 묘 아래에 흑요암으로 된 신도비가 있으며, 봉분 앞에 묘표(墓表)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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