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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53
한자 李恒福
이칭/별칭 자상(子常),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崗),청화진인(淸化眞人),문충(文忠),오성 대감,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혜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6년 10월연표보기 - 이항복 생
활동 시기/일시 1575년 - 이항복 진사 합격
몰년 시기/일시 1618년연표보기 - 이항복 졸
추모 시기/일시 1627년 - 이항복 추모하는 노덕 서원 건립
추모 시기/일시 1635년 - 이항복 추모하는 사당을 포천에 세움
추모 시기/일시 1659년 - 이항복 추모하는 포천 사당에 화산 서원 사액
추모 시기/일시 1746년 - 이항복 영조 영당(影堂) 제사
출생지 이항복 출생지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이항복 거주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산 1-2
거주|이주지 이항복 거주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거주|이주지 이항복 거주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유배|이배지 이항복 유배지 - 함경북도 북청군
묘소|단소 이항복 묘소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
사당|배향지 노덕 서원 - 함경북도 북청군 북청읍 동리
사당|배향지 화산 서원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산16-1
성격 문신|유학자
성별
본관 경주(慶州)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도봉산도봉 서원을 소재로 시로 읊은 문신이자 유학자.

[개설]

이항복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오성 대감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절친한 사이였던 이덕형(李德馨)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화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號)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崗)·청화진인(淸化眞人). 아버지는 참찬 이몽량(李夢亮)으로 중종·인종·명종 3조(朝)에 걸쳐 대사간·병조참판·경기 감사·예조참판·도승지·한성부 판윤·형조판서 등 주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다. 어머니는 결성 현감을 지낸 최윤(崔崙)의 딸인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다. 부인은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 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진 권율(權慄)의 딸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로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슬하에 이성남(李星男), 이정남(李井男) 두 아들을 두었고, 측실 소생으로 역시 두 아들 이규남(李奎男), 이기남(李箕男)을 두었다.

[활동 사항]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서울에서 출생하여 1575년(선조 8)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80년(선조 13) 2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선조에게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의하고 정자에 임명되었다. 뒤이어 저작, 박사로 승진하고 예문관 봉교,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지제교,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으로 왕이 직접 국문(鞫問)을 할 때 이항복이 이를 주선하면서 관대하게 법을 적용하여 많은 사람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 뒤 통정대부에 봉해지고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 받았다. 1591년(선조 24) 봄 호조참의가 되고 추충분의 평난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의 호를 하사받았고, 이후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할 것을 건의하고 어가(御駕)를 호위하였으며, 이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뒤이어 형조판서 겸 오위도 총관(五衛都摠管)·대사헌·병조판서 겸 홍문관 제학 등에 잇따라 제수되었다. 왜군(倭軍)이 서울에서 퇴각하자 환도(還都)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고, 1596년(선조 29) 부사 양방형(楊邦亨)의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598년(선조 31) 가을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고 부원군(府院君)으로 작위가 올라갔으며, 1600년(선조 33) 도체찰사 겸 도원수에 제수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2년 후 정철(鄭澈)과 가깝게 지냈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이후 어가를 호종한 공으로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 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의 호를 하사받고 위성(衛聖)·익사(翼社)·형난(亨難) 등 3공신(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사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극력 반대하였으나, 때마침 천거의 일을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물러나게 되었다. 이에 노원(蘆原)의 촌가(村家)에서 독서를 하며 잠시 기거하다가 망우리에 작은 집을 짓고 옮겨와 살았다. 1617년(광해군 9) 겨울에 폐모론(廢母論)이 또 일어나자 이항복은 말질(末疾)에 걸려 있었음에도 붓을 잡고 통렬히 반대하는 글을 써 올렸고, 이 때문에 북청(北靑)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귀양길에 오르면서 스스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의금(衣衾)과 염습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챙겨 갔다. 유배지에 도착하자 지병이던 풍질(風疾)이 다시 발작하여 세상을 뜨니 향년 63세였다.

[학문과 저술]

학문을 하는 데에 장구(章句)나 도수(度數)에 관심을 갖기보다 본원(本源)에 부합하고자 하였으며, 문장에는 크고 뛰어난 기운이 넘쳤으며 호방하여 언제나 큰 뜻을 벗어나지 않았다. 필적 또한 호탕한 법도가 갖추어져 있었다. 저술로 문집인 『백사집(白沙集)』과 『조천창수록(朝天唱酬錄)』 1권, 『주의(奏議)』 2권, 『계사(啓辭)』 2권, 『예경(禮經)』을 편집한 『사례훈몽(四禮訓蒙)』과 『좌씨전(左氏傳)』·『내외전(內外傳)』을 비교 검토한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 등이 있다. 노원에 거주하면서 도봉 서원을 드나들기도 하고, 또 도봉산을 소재 삼아 시를 읊기도 하였다. 이때 지은 시인 「도봉 서원에 묵으면서 세 절구를 읊다[宿道峯書院三絶]」, 「가을날에[秋日]」, 「가을날에 도봉산에서 노닐다[秋日遊道峯山]」 등이 문집에 전한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번지에 있으며, 1975년 경기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이항복이 유배지에서 죽자 광해군이 관작을 원상으로 회복시켜 주었고, 중종이 즉위 후 유사(有司)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명하여 제사를 올리도록 명하였다. 1627년(인조 5) 유배지 북청에 노덕 서원(老德書院)을 세우고, 1635년(인조 13) 포천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는데, 1659년(효종 10) 화산 서원(花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746년(영조 22)에는 영조가 승지를 보내 영당(影堂)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등용하게 하였다. 1832년(순조 32) 임진왜란 발발 4주갑(周甲)[240년]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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