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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709
한자 宋鎭禹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16길 52-36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류정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0년 5월 8일[음력]연표보기 - 송진우 생
수학 시기/일시 1906년 4월 - 송진우 담양 창평 영학숙 입학
몰년 시기/일시 1945년 12월 30일연표보기 - 송진우 졸
추모 시기/일시 1963년 - 송진우 건국 훈장 국민장 추서
출생지 송진우 출생지 - 전라남도 담양군
거주|이주지 송진우 거주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291-1지도보기
묘소 국립 서울 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성격 독립운동가|언론인|정치인
성별
대표 경력 『동아 일보』 사장

[정의]

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며 언론인이자 정치인.

[가계]

본관은 신평(新平)[충청남도 당진시]. 호는 고하(古下). 어릴 때 이름은 옥윤(玉潤)이다. 조선 태종(太宗) 때 문신으로 전라남도 담양군에 은거한 송희경(宋希璟)의 19세손이다. 아버지는 송훈(宋壎)이고, 어머니는 남원 양씨이다. 9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3명의 형과 1명의 누나, 4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셋째 여동생은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의 집안으로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1. 일제 강점기

1) 수학 및 교육 운동

송진우(宋鎭禹)[1890~1945]는 1890년 5월 8일[음력]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났다. 1906년 4월 담양 창평 영학숙에 입학하였으며, 1908년 10월 세이소쿠 영어 학교[正則英語學校] 입학하였다. 1909년 4월 긴조 중학교[錦城中學校] 5학년에 편입하였으며, 1910년 4월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였다. 1911년 4월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전입하였다. 1912년 10월 조선 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하여 총무를 맡았고, 유학생회의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 발간에 참여하였다.

1915년 7월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뒤 1916년 김성수와 함께 중앙 학교를 인수하여 학감(學監)이 되었으며 이어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8년 김성수·현상윤(玄相允)·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중앙 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논의하였고 이것이 이후 3·1 운동의 결실로 나타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며칠 뒤 구속되어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 다음해 10월 경성 복심 법원 판결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곧 출옥하였다.

2) 언론 운동

1921년 9월 『동아 일보』 3대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이후 『동아 일보』를 통하여 민족 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1922년 물산 장려 운동(物産奬勵運動)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을 추진하였다. 1924년 4월 『동아 일보』 사장 자리에서 퇴임하고 10월 고문으로 취임하였으며, 1925년 4월 주필로 취임하였다. 1926년 3월 국제 농민 본부에서 보낸 삼일절 기념사 관계로 『동아 일보』가 제2차 무기 정간을 당하였고, 이때 주필로서 징역 6월을 선고 받았다. 같은 해 11월 국제 농민 본부 기념사 사건으로 징역 6월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던 중, 이듬해 2월 일본 쇼와[昭和] 천황 즉위 기념 특사로 출옥하였다. 1927년 10월 『동아 일보』 제6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30년에는 『동아 일보』 창간 10주년 기념 축사 관계로 제3차 무기 정간을 당하였고 그 해 9월에 속간하였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는 문맹 퇴치를 위한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만주에서 완바오 산 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송진우는 사설을 통해 이 사건이 일본의 한중 이간책임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한중 민간의 보복 중지와 희생된 중국인의 위문 사업을 전개하여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주석으로부터 은패(銀牌)를 받기도 하였다.

1936년 8월에는 소위 손기정(孫基禎)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 일보』가 제4차 무기 정간을 당하면서 11월 총독부의 압력으로 사장직을 사퇴하였다. 다음 해 6월 『동아 일보』의 복간과 함께 고문이 되었으나 1939년 12월 다시 총독부로부터 『동아 일보』의 자진 폐간을 강요당하였다. 송진우는 이를 거절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객들에게 『동아 일보』 폐간의 부당함을 역설하였으나 귀국 도중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1940년 8월 『동아 일보』는 강제 폐간되었고 송진우는 주식회사 동아 일보사 청산 위원에 선임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총독부로부터 학도병 권유 유세 등 대일 협력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였다. 1943년 동아 일보사 청산 위원회가 해체되고 동본사(東本社)가 설립되자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일본 총독부로부터 해방 후 치안권 위임 등을 제안받기도 하였으나 거부하였다. 이후 조선 총독부는 여운형(呂運亨)과 접촉하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일제 말기 송진우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281-1번지[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291-1번지]로 이사하여 1938년부터 1945년까지 거주하였다. 당시 창동에는 정인보(鄭寅普), 김병로(金炳魯), 홍명희(洪命憙) 등이 은거하고 있었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291-1번지에 있던 송진우의 가옥은 현재 옛 집터만 남아 있다.

2. 해방 후

해방 후 송진우는 1945년 9월 7일 국민 대회 준비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9월 16일 한국 민주당이 결성되자 당수격인 수석 총무로 추대되었다. 12월 1일 『동아 일보』가 복간되자 제8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12월 28일 신탁 통치 문제로 아놀드 에이 브이(Arnold A. V.) 미군정 장관과 회담을 통하여 반탁 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였으며, 29일 밤에는 경교장(京橋莊)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과 회담하였다. 송진우는 미군정청과 충돌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신중론을 폈다. 그러나 송진우는 12월 30일 오전 6시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74번지 자택에서 민족주의자 과격파에 속하는 한현우(韓賢宇) 등 6명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묘소]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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