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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778
한자 洪起武
이칭/별칭 홍기은(洪起殷)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류정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홍기무 생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1월연표보기 - 홍기무 서울 신문사 문화부장 입사
거주|이주지 홍기무 거주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820지도보기
성격 학자|정치가
성별
본관 풍산
대표 경력 사회 과학원 소장

[정의]

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에 거주한 학자이자 정치가.

[가계]

홍기무(洪起武)[1910~?]의 가문은 풍산 홍씨 추만공파(秋巒公派)로서 노론계 명문 사대부가이다. 고조할아버지 홍우길(洪祐吉)은 평안 감사,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증조할아버지 홍승목(洪承穆)은 병조참판을 거쳐 대한 제국 시기 중추원 찬의(贊議)를 지냈고, 할아버지 홍범식(洪範植)은 금산 군수로서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 비분강개하며 자결한 순국열사이다. 아버지는 『임꺽정』을 저술한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서 명성 황후의 일족이었다. 외할아버지 민영만(閔泳晩)은 을사늑약 당시 자결한 민영환과 6촌 사이로서 종2품 가선대부로 규장각 직학사(直學士)를 지냈다. 홍기무는 2남 3녀 중 차남으로서 형제로는 형 홍기문(洪起文), 여동생 홍수경, 홍무경, 홍계경이 있다. 부인은 정인보(鄭寅普)의 차녀 정경완이다.

[활동 사항]

홍기무는 1910년에 태어났으며, 본명은 홍기은(洪起殷)이다. 형 홍기문이 일본 유학 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아버지 홍명희와 함께 신간회 창립에 일익을 담당할 만큼 사회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데 반해, 홍기무는 사회적인 활동이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대신 홍기문만큼이나 총명하고 학구열이 강했다. 형 홍기문이 재혼 문제로 아버지 홍명희와 불화를 빚게 된 후 홍기무가 부모를 모셨다.

홍명희가 1939년 말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서울을 떠나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244-1번지[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820번지 신도 브레뉴 아파트 103동 자리]로 은거하게 되었을 때에도 함께 이사하였다. 이듬해에 홍명희의 절친한 벗이었던 정인보도 같은 동네로 이주하게 되어 자주 왕래하였는데, 정인보홍기무를 총애하여 1942년 3월 자신의 딸 정경완과 혼인시켰다.

창동에 거주하던 시절 홍기무는 아버지 홍명희와 장인 정인보에게 가르침을 배우며 학문을 정진하는 데에 힘썼다. 이 당시 홍명희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기 때문에 치안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며칠씩 예비검속을 당하곤 하였는데, 홍기무 역시 아버지와 함께 예비검속을 당하였다.

해방 이후 조선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서울 신문』으로 재창간되면서 옛 신간회 인사들이 다수 기용되었는데, 홍명희도 서울 신문사 고문직을 맡았으며 홍기문이 편집국장직을 맡았다. 홍기무 역시 서울 신문사에 입사하면서 처음으로 직업을 갖게 되었는데, 출범 당시 문화부장직을 맡았다가 얼마 후 편집부국장이 되었다.

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 정국에서 홍명희는 민족 통일이 최우선이라고 여기며 중간파 세력의 결집에 노력하였는데, 1946년 8월 민족 통일당을 창당하고 1947년 10월에는 다른 여타 중도 정당들과 통합하여 민주 독립당을 창당하였다. 홍기무도 역시 아버지 홍명희를 따라 민주 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홍기무는 아버지 홍명희나 형 홍기문보다 더욱 사상적으로 급진화되어 남조선 노동당 비밀 당원으로 활약하였다.

1948년에 이르러 남한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이 전쟁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홍명희는 단독 선거 반대를 천명하고 이후에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1948년 4월 20일 홍기무도 평양에 도착하여 홍명희를 보좌하였다. 이후 김구·김규식 등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한 남측 대표는 대부분 남으로 내려갔으나 홍명희는 북에 남았다. 이때에 홍명희는 북측 지도부의 역량에 깊은 감명을 받고 또한 북한의 장래에 대해 낙관하게 되어, 곧 일가를 모두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이에 따라 홍기무의 일가는 1948년 8월 형 홍기문 일가와 함께 월북하였고, 이후 북한에서 사회 과학원 소장을 역임하였다.

[저술 및 작품]

『조선의 민속놀이』[사회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1964]에 「씨름」·「돌팔매 놀이」 등의 글이 보이나 자료가 없어 전모를 잘 알 수 없다.

[묘소]

북한 평양 애국 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5.02 가계 수정 부인은 정인보의 맏딸 정경완이다. -> 부인은 정인보의 차녀 정경완이다.
이용자 의견
박** '홍기무'의 부인 '정경완'은 정인보 선생의 맏딸이 아니라 2녀이다. 선생의 맏딸은 우리나라 초대 침선장인 정정완님이다.
  • 답변
  •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2017.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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